12월 13일, ‘루시아’의 빛 세상을 밝히다
12월 13일, ‘루시아’의 빛 세상을 밝히다
  • 이석원 기자
  • 승인 2017.12.18 15: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성당 안은 온통 어둠이다. 사람들도 쥐죽은 듯 고요하다. 성당의 제일 뒤편에서부터 한 무리의 흰옷을 입은 아이들이 들어온다. 그들의 맨 앞에는 머리에 7개의 양초를 얹은 관을 쓴 소녀가 있다. 그 뒤를 여자 아이들과 남자 아이들이 따르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성당 뒤편으로 향한다.

이내 성당의 맨 앞자리에 이른 흰옷의 아이들은 노래를 이어간다. 머리에 양초관을 쓴 소녀를 중심으로 어둠 속에서 그들이 들고 있는 초들이 밝은 빛을 낸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은 또 다른 밝은 빛이다. 어둠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어둠 속 저 빛들은 낯설도록 영롱하다.

 

▲ 스웨덴 최대 가톡릭 성당인 상트 에릭 대성당에서 열린 루시아

 

스웨덴에서 가장 화려한 이벤트들이 전국 곳곳, 크고 작은 교회는 물론 학교와 회사, 시장과 거리에서 이어지는 날. 12월 13일 루시아 데이(Lucia day. 스웨덴어로 Luciasdag)다. 이미 오후 3시면 완전히 밤이 되는 곳. 비록 공휴일은 아니지만,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약 열흘 뒤 찾아오는 크리스마스보다도 더 요란한 행사들이 펼쳐지는 날이다.

12월 13일은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에 속한다. 루시아로 뽑힌 여자 아이는 붉은 천으로 만든 허리띠를 두른 순백의 단아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리고 머리에는 7개의 양초와 블루베리 가지로 만든 관을 쓴다. ‘휀고사(stjärngosse)’라고 불리는 남자 아이들과 ‘루시아의 태르누르(Lucias tärnor)’라고 불리는 여자 아이들이 초를 들고 긴 줄을 만들어 루시아의 뒤를 따른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이를 ‘루시아 톡(Lucia tåg)’이라고 부른다.

루시아와 아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그뢱(Glögg)’이라고 부르는 계피를 넣어 끓인 와인과 생강으로 만든 쿠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라는 샤프론을 넣어 만든 빵 ‘루세카테르(Lussekatter. 루시아의 고양이들이라는 뜻)’를 나눠준다.

스웨덴의 ‘루시아’는 고대 농경 사회의 전설과 기독교 신앙이 결합된 특별한 날이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제일 짧은 날이다. 이날은 오래전부터 어둠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스웨덴 사람들은 온갖 귀신과 요물이 활동하는 밤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었다.

 

▲ 지난 13일 스웨덴 공영 방송인 SVT에서 생중계한 쿵스홀름 교회의 루시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 시라쿠스 출신인 성녀 루시아는 기독교에서 빛의 성인으로 통한다. 루시아라는 이름이 빛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룩스(LUX)’에서 유래했다.

스웨덴 고대 농경 사회의 전설과 기독교의 성녀 루시아가 결합했다. 성녀 루시아가 교회를 출발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두려운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선사한다. 루시아의 빛이 귀신과 요물들을 도망치게 하고, 동물들이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을 막아준다. 가장 어두운 두려움의 밤이 가장 찬란한 빛으로 바뀌는 기적이 된 것이다.

루시아와 노벨상이 결합된 에피소드도 있다. 노벨상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루시아 직전이다. 스톡홀름 시내 콘서트홀에서 시상식을 마친 수상자들은 스톡홀름 시청 1층 블루홀에서 화려한 만찬 파티를 즐긴다. 그리고 그들은 스톡홀름에서 가장 비싼 그랜드 호텔에 묵는다.

그런데 그곳에 루시아가 찾아간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파티의 여흥을 즐기고 있을 무렵 실내가 어두워지고 루시아와 아이들이 등장해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그뢱과 루세카테르를 나눠준다. 201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갑자기 등장한 루시아를 보고 놀라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지금도 스웨덴의 신문과 방송에 간간히 등장한다.

 

▲ 스톡홀름 인근 밸링뷔에 있는 루터교 성당인 상트 토마스 성당에서 열린 어린이 루시아

 

스웨덴 사회에서 루시아를 했었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다. 루시아가 되려면 평소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부를 잘 하거나, 외모가 뛰어난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지만, 봉사 활동은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된다. 평소 자선 활동을 많이 했거나 선행을 많이 베풀었던 것도 루시아가 되기 위한 요건 중 하나다.

루시아를 했던 경력을 이력서에 쓰는 경우도 많다. 말하자면 괜찮은 ‘스펙’이 되는 셈이다. 2011년 28살의 나이에 스웨덴 3대 정당 중 하나인 중앙당의 당수가 된 아니 뢰프는 처음 기초지방의원을 할 때와 국회의원을 할 때 이력서에 루시아를 했었음을 기재했다. 그는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루시아를 했던 일을 늘 자랑했다. 한 방송사의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자신의 경력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국회의원이나 최연소 중앙당 당수가 아니라 루시아를 했던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루터교가 국교인 스웨덴에서 율(Jul)이라고 부르는 성탄이 큰 명절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율은 가족 명절이다. 대외적인 행사보다는 교회에서 미사를 보고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는 정도다.

하지만 성탄을 준비하는 루시아는 다르다. 스웨덴 공영 방송이 SVT에서는 루시아를 생중계한다. 금년에는 스톡홀름 시청 근처에 있는 쿵스홀름 교회(Kungsholms kyrka)의 루시아를 1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전국에 내보냈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