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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도 한철의 봄이 있다

<연재>강진수의 ‘서울, 이상을 읽다'-7회 강진수 기자lrkdwlstn96@naver.coml승인2017.12.2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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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겨울일 것 같은 그, 한겨울 녹일만한 봄의 순간도 있어
그가 가진 특유의 문체 사라지고 오직 맑은 정신만 남아
늘 불안정했던 시선에도 안정된 묘사들로 삶 위로해
천재 이상만 찾지만 천재 없는 그곳엔 시인이 있어

 

여기 시인에게도 한 철의 봄이 있다. 봄은 늘 시인들이 시를 쓰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다. 이상도 신기하게 봄철에는 기운이 오르고 정신이 맑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를 읽으면 봄의 계절성이 가끔 묻어나는 것들이 있다. 요즈음은 날이 갈수록 추워지는 겨울, 그 한겨울에 이상이 설레 하는 봄을 구경하는 재미란 꽤 괜찮다. 절대로 봄을 기대하지 않을 것만 같던 시인이 더욱이 그러하는 모습에 우리는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에겐 늘 겨울만 있을 것만 같았는데, 한겨울을 녹일만한 봄의 순간이 그에게도 있다.
 

▲ 시인 이상

여기 한 페―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계절에서는
얹은 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 접힌

들여다보아도 들여다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만적하는대로 수심이 평행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거절
우(右)편으로 옮겨 앉은 심장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촉진(觸診)……
하고 손이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 막으며
선뜩하는 차단뿐이다.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하드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장 넘겨서
맞섰던 계절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지
거울은 페―지의 그냥 표지

- ‘비시명경(扉詩明鏡)’, 이상
 

문짝을 나섰더니 봄이 온 모양이다.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 향기가 가득하다. 밝은 햇살이 그가 서있는 문짝 사이로 흐른다. 얼마나 따스하고 아름다운 계절일까. 오월, 몇 번이고 외출하고 싶은 날 그의 마음은 망설이고 있다. 심장의 고동도 느끼고 있다. 이상의 인생은 칙칙하고 어두운 장면만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수많은 희열과 탐미적 순간들이 그의 인생을 거쳐 갔다. 그러고도 다시 돌아오는 봄처럼 그의 맑고 고운 시점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 문짝에 서서 거울에 비치는 봄 햇살을 구경하듯이, 그것을 보면서 외출을 망설이는 그의 마음이 또 그러하듯이, 그는 어느 순간 누구보다도 밝은 사람이 되어있다.

또 다른 그의 시가 봄을 노래한다. 이상은 봄을 노래하는 시마다 제대로 된 맞춤법을 쓰고 있다. 그가 가진 특유의 문체가 사라지고 오직 맑은 그의 정신만이 남아 있는 것만 같다. 때론 그런 그의 모습이 낭만적으로까지 보인다. 꽃이 피고 산이 펼쳐져 있다. 그 광경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늘 불안정해보이기만 했었는데, 그런 와중의 안정된 묘사들이 그의 피로한 삶을 위로하고 있다.
 

건드리면 손끝에 묻을 듯이 빨간 봉선화
너울너울 하마 날아오를 듯 하얀 봉선화
그리고 어느 틈엔가 남(南)으로 고개를 돌리는듯한 일편단심의 해바라기―
이런 꽃으로 꾸며졌다는 고호의 무덤은 참 얼마나 미(美)로우리까.

산은 맑은 날 바라보아도
늦은 봄비에 젖은 듯 보얗습니다.

포플라는 마을의 지표와도 같이
실바람에도 그 뽑은 듯 헌출한 키를
포물선으로 굽혀가면서 진공과 같이 마알간 대기 속에서
원경(遠景)을 축소하고 있습니다.

몸과 나래도 가벼운 듯이 잠자리가 활동입니다
헌데 그것은 과연 날고 있는 걸까요
흡사 진공 속에서라도 날을 법한데,
혹 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을 이리저리 당기는 것이 아니겠나요.

- ‘청령’, 이상
 

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줄을 이리저리 당기는 것일까. 그의 호기심에 젖은 눈은 한낱 잠자리를 신비스러운 동물로 만든다. 이상 역시도 바라보는 모든 것에 궁금해 하고 또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 다만 시대는 그런 그의 평범하고 앳된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수작을 부렸다. 지금까지도 이상,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뻔하듯이. 오히려 뻔하다면 뻔한, 이상의 평범한 모습들이 너무나도 맑고 투명한 영상을 비추는데도, 우리는 천재 이상만을 찾는다. 그러나 천재는 없고 그곳엔 시인이 있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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