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내는 어디서 왔느냐
저 사내는 어디서 왔느냐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01.02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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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강진수의 ‘서울, 이상을 읽다'-8회
▲ 자료사진=pixabay.com

시인은 자신의 시 안에 자신의 역사를 새겨 넣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숙명처럼 너무나도 당연히 그것은 새겨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괴로워하는 시인도, 그렇기에 더 당당해지고 싶어 하는 시인도, 또 그렇기에 자신의 역사를 증오하는 시인도 탄생할 수 있다. 이상의 역사가 담긴 시는 지나치게 길고 지나치게 비겁하다. 지면에 싣기 부끄러울 정도로 길고 긴 역사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시인 이상의 역사가 배고픈 얼굴 속에 남루하게 남아있다.
 

▲ 시인 이상

배고픈 얼굴을 본다.

반드르르한 머리카락 밑에 어째서 배고픈 얼굴은 있느냐.

저 사내는 어디서 왔느냐.
저 사내는 어디서 왔느냐.

저 사내 어머니의 얼굴은 박색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저 사내 아버지의 얼굴은 잘 생겼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함은 저 사내 아버지는 워낙은 부자였던 것인데 저 사내 어머니를 취(娶)한 후로는 갑자기 가난든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거니와 참으로 아해(兒孩)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를 더 닮는다는 것은 그 무슨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행(性行)을 말하는 것이지만 저 사내 얼굴을 보면 저 사내는 나면서 이후 대체 웃어 본 적이 있었느냐고 생각되리만큼 험상궂은 얼굴이라는 점으로 보아 저 사내는 나면서 이후 한번도 웃어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울어 본 적도 없었으리라 믿어지므로 더욱더 험상궂은 얼굴임은 저 사내는 저 사내 어머니의 얼굴만을 보고 자라났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저 사내 아버지는 웃기도 하고 하였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지만 대체로 아해라고 하는 것은 곧잘 무엇이나 흉내내는 성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내가 조금도 웃을 줄을 모르는 것같은 얼굴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저 사내 아버지는 해외를 방랑하여 저 사내가 제법 사람구실을 하는 저 사내로 장성한 후로도 아직 돌아오지 아니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또 그렇다면 저 사내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그날 그날을 먹고 살아 왔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물론이지만 어쨌든 간에 저 사내 어머니는 배고팠을 것임에 틀림없으므로 배고픈 얼굴을 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는데 귀여운 외톨자식인지라 저 사내만은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배고프지 않도록 하여서 길리낸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지만 아무튼 아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를 가장 의지하는 것인즉 어머니의 얼굴만을 보고 저것이 정말로 마땅스런 얼굴이구나 하고 믿어버리고선 어머니의 얼굴만을 열심으로 흉내낸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어서 그것이 지금은 입에다 금니를 박은 신분과 시절이 되었으면서도 이젠 어쩔 수도 없으리 만큼 굳어버리고 만 것이나 아닐까고 생각되는 것은 무리도 없는 일인데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반드르르한 머리카락 밑에 어째서 저 험상궂은 배고픈 얼굴은 있느냐.

- ‘얼굴’, 이상.
 

이것은 누가 봐도 끔찍한 자화상이다. 어떤 화가라도 자화상을 그렸다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인물일 것이다. 시인에게도 자화상이란 그렇다. 거울이란 것은 너무 무서운 발명품이다. 그리고 그 거울을 비췄을 때, 그 속에 배고픈 얼굴, 이름 모를 사내가 들어앉아 있다면. 누구라도 내 얼굴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이상은 애써 모른 척 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인의 역사다. 역사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아이의 몸인 이상, 김해경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어떻게든 숨기고 싶던 그의 역사는 오히려 그 자신으로 인해 치밀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끔찍한 자화상 옆 끔찍한 그의 가난. 이상,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대체 왜 그런 가난을 겪어야만 했는지. 사실 그런 의무 따위는 없다. 다만 그는 운이 없게 시인이 되었고, 그런 슬픈 역사를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남들이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에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해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상이라는 사내는 조금도 웃을 줄 모르는, 어쩌면 험상궂은 배고픈 얼굴만이 덩그러니 남아버린 것이다.

무엇에 배고팠던 것인지는 시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일 테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배고픔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것은 밥에, 빵에 굶주린 배고픔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애정에 대한 굶주림일 수도 있고, 어떤 과거의 결핍일 수도 있다. 또는 벌레처럼 자신을 갉아먹는 인생에 대한 배고픔일 수도 있다. 그 역시도 가난한 인생을 살지 않고 그로부터 탈피하고 싶다는 배고픔에 시달려 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배고픔의 끝은 어땠을까. 시인의 삶과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의 끝이 그리 밝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최후.
이미 여하한 정신도 발아(發芽)하지 아니한다.
- ‘최후’, 이상.
 

능금 한 알이 되어 추락하는 이상을 보라. 지구는 이미 부서져 있어 능금은 제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다. 제 몸이 썩고 썩어 또 다른 정신의 싹이 나길 기대하기에는, 최후, 그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고 가난한 것이다. 최후의 이상 역시 끊임없는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 이상이 스스로 정한 자기 역사의 마지막 장이 되었다. 초라하게 추락할 이상을 너무 잘 알고 있으므로 그의 비루한 역사에 우리는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그렇게 초라하던 이상이 다시 태어난 현세란. 끔찍한 자화상 위로 피어난 한 송이 화려한 꽃처럼 그의 시는 죽어버린 이상의 몸 위로 다시 태어났다.

이상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직 이 연재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최후를 최종회에서만 다루어야 할 것 같은 편견처럼, 그의 역사는 죽었다가도 다시 깨어나 단상 위를 오른다. 여전히 배고픔에 시달려 하며. 숙명이라는 탯줄을 끊기 위해 시인은 그토록 긴 변명들을 늘어놓았을까. 발아하지 못한 정신이 이상의 역사 끄트머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추락한 능금이 품고 있는 씨앗, 나는 이상으로부터 그 씨앗을 보고 말았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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