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머슴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면서 TV에서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난 그렇게 즐거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당직골은 어린 나에겐 단순한 고향 이상의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때론 어머니의 포근한 품이 되어주기도 했으며, 때론 다소 거칠지만 훨씬 너른 아버지의 등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사시사철 자연 속에서 뛰어놀던 내가 현대 문명을 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아마도 6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당시 시골에선 구경조차 힘든 라디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먼 친척 되시는 할머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할머니께서 우리집 뒤칸 방으로 이사를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에게 라디오가 있었다. 나에게 그 조그마한 현대문명은 더할 나위 없는 신비로 다가왔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아주 작은 상자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그런데 그 안에는 분명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소리가 들렸고, 때론 음악이 나오기도 했다.

처음엔 진짜 사람이 들어가 있는 줄 알고 뒤쪽을 만지작 거리며 그 작은 상자 안으로 들어가보려는 시도까지 했을 정도니….

 

▲ 사진=pixabay.com

 

장터를 처음 접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함께 안성 근처의 죽산이라는 읍내장터에 나간 것이었다. 장터는 인산인해였다. 무슨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또 바쁘게 움직이는 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당직골을 벗어난 적이 없던 나에겐 모든게 경이로 다가올 뿐이었다. 온갖 생활필수품들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물론 아직 어린 내가 처음 보는 생소한 물건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몇몇 사람과 아는 채를 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내 손을 이끌고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생전 처음 가보는 음식점에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을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것을 먹을 거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가리키면서…. 사람들은 각각 두 가지 음식을 시켜 먹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검은색으로 된 국수를 먹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흰색 국수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국수라도 면이 달랐다. 집에서 가끔 먹어본 것보다 훨씬 굵었던 것이다.

그런데 관심이 쏠리는 건 검은색이었다. 난 검은색을 먹겠노라고 아버지에게 얘기했다. 이쯤되면 독자님들은 그 음식이 뭐라는 걸 짐작하셨을 게다. 바로 자장면이다. 흰색은 물론 우동이고….

음식을 주문하면서 보니 저쪽 한 귀퉁이에서 꽝꽝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웬 덩치 좋은 남자가 웃통을 벗어제낀 채 밀가루를 탁자 위에 쳐대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신기하게도 밀가루는 한번 쳐댄 다음 양쪽으로 늘렸다가 다시 감을 때마다 몇가닥으로 순식간에 나뉘어졌다.

한참을 기다리자 검은색 음식이 내 앞에 놓여졌다. 아버지 앞에는 흰색 국수가 놓여졌다.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내 검은색 음식을 비벼주셨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독특한 향내가 코끝을 찔러왔다.

검은색 면발을 한 입 가득 집어넣었다. 갑자기 목에서 `웩`하고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먹어보는 비릿한 자장면에 목구멍이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아버지가 웃으셨다. 그리곤 우동국물을 한숟가락 떠서 입안으로 넣어주면서 천천히 먹어보라고 얘기하셨다.

다시 먹어보니 이번엔 조금은 괜찮은 것 같았다. 그리곤 간신히 한그릇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왠지 뒤끝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 뒤로 서울로 올라 올 때까지 거의 수년간 다시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는 걸 알았다면 내 목구멍도 그렇게 거부반응을 일으키진 않았을 텐데….

생전 처음 접한 자장면과의 조우를 그렇게 유쾌하지 못하게 끝내고 다음에 들른 곳은 이발소였다. 아버지께서 이발을 하시기 위함이었다. 내 머리는 항상 집에서 아버지가 깎아 주시곤 했다. 그러다보니 맨날 빡빡머리인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까 이발소란 곳도 이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장날이어서인지 이발소 안에는 사람들로 빽빽했다. 이발을 하는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열심히 사람들의 머리를 깎고 있었고 조수로 보이는 젊은 형은 비누거품을 사람들의 얼굴에 묻힌 채 면도를 하거나 머리를 감겨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다른 신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조그마한 상자 속에서 나오는 사람 목소리도 그저 신기했던 나에게 사람들이 온몸으로 움직이는 게 그대로 보이는 텔레비전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 조그마한 네모 상자 속에 사람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상자의 뚜껑을 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가 이발하는 틈을 타 주인 아저씨 몰래 네모 상자 뒤편으로 가 뒷뚜껑을 만지작 거리다 결국 들통이 났고 호되게 야단을 맞아야 했다.

난 그날 집에 돌아와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곤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누구건 살고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처럼 남들에게 보여진다. 내가 행동하는 모습 하나하나도 누군가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연기를 해보기로 했다.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아마 부엌에서 썰매를 만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생각, 쓰잘데기 없이 엉덩이 춤을 추며 부뚜막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혼자 입으로 알 수 없는 소리들을 중얼중얼 거리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지도 않을 얘기지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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