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역사 속으로…
의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역사 속으로…
  • 구혜리 기자
  • 승인 2018.01.04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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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신라 고도 경주 샅샅이 훑기-3회/ 구혜리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서너 번 다녀왔던 경주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본가의 오래된 보물단지를 정리하면서 발견된 역사책이 계기가 되었지요. 사실 수학여행 기억으로는 친구들과의 추억이 전부인지라 (다들 그렇지요?) 이번에 한국사를 다시 공부하며 신라 역사의 본토지인 경주를 다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놓치고 지나쳤던 수많은 것들을 다시 바라보며 다양한 생각과 감동이 피어올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귀에, 항상 애국이란 말이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눈에, 나라라는 글자가 배회하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신채호,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 조선상고사-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가슴 속에 역사에 대한 불꽃을 일어준 신채호 선생은 늘 낭가사상을 강조했습니다. 낭가사상하면 화랑이 떠오르지요. ‘화랑’이란 꽃처럼 아름다운 청년을 뜻하며 신라 진흥왕 때에 정비된 청소년 수련 단체입니다. 청소년 때부터 세속오계로써 엄격한 규율로 학문과 무예를 단련한 화랑은 신라가 이룬 삼한통일의 주역이자 뿌리였다 할 수 있습니다. 산과 계곡을 누비며 심신 수련을 통해 호연지기와 진취적 기상을 기르는 화랑도. 신채호 선생님은 이 화랑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을 해석한 것입니다.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이야기에 공감하는 능력을 역사 감수성이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상황 속에서 뼛속까지 조선인의 역사 감수성을 지닌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조선인을 닮은 시각을 가졌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있던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에 느끼는 아픔의 깊이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끝나지 않은 담론들. 유독 한일 외교에 민감하고 조선이 이룬 업적에 자부심이 강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아직 조선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조선에 머무른 역사 감수성이 존재할 수 있는 건, 과거를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오늘날의 창작물로 만들어주는 숱한 예술인들의 노력과 정치 경제 사회 곳곳에서 한국의 역사를 붙잡아주고 있는 역사가들의 땀과 눈물도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역사적 감수성을 넓히고 싶습니다. 경주라는 또 다른 고향에 찾아온 이 순간만큼 역사 감수성을 신라까지 뻗어 소중한 우리 유산과 역사를 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부처를 알리기까지, 이차돈 꿈이 잠든 백률사

여정 상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장 처음 다녀왔지만, 먼저 소개하고 싶었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백률사입니다. 백률사는 신라에 처음 불교를 확립한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절이지요.

소금강산 속에 지어진 백률사를 보기 위해서는 산 입구에서 300m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가는 길 중간에 보물 제121호로 지정된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도 보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 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땅을 파보니 이 바위가 나와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긴 것이라 전해집니다.

 

 

불상 앞에서 불도를 닦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공손히 마음을 정비해봅니다. ‘아- 정말 산 속이네’ 오르고 오르다 보니 작은 사찰이 보입니다. 백률사에서 발견된 이차돈 순교비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현재 백률사는 대웅전, 범종각, 선원, 요사채가 전부인 작은 사찰이지만 곳곳에 석가모니의 숨결이 닿아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불교가 확립되기 이전의 신라는 상대적으로 강한 토착 문화를 지닌 데다 신분의 차이를 거부하는 불교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귀족들은 토착 신앙을 이끌어 제사와 권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토착 신앙의 혁파는 귀족층의 권력을 약화시킴과 같고 곧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법흥왕 14년(527) 이차돈과 큰 결단을 내립니다. 먼저 이차돈은 천경림의 나무를 베어 절을 지으라는 왕의 명령을 따릅니다. 천경림은 토착 신앙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유서 깊고 성스럽게 중시되던 곳입니다. 분노한 귀족들은 이차돈을 법흥왕 앞으로 끌고 갔고, 법흥왕은 이차돈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백률사 석당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차돈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솟구쳤으며 꽃잎이 휘날렸고, 잘린 머리는 높이 하늘을 날아 떨어졌는데 그 떨어진 곳이 백률사의 터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슬퍼하고 감동하는 한편 기이하고 신통하게 여겨 불교를 받아들이고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여 백률사를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죽음을 앞에 둔 이차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의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역사 속에서 종교를 넘어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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