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기획> ‘막노동꾼' 이야기-2회: 기민수 씨

 

대다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는 특별한 기술도 기능도 없다. 이들에게 노동 현장은 늘 낯설고 두렵다. 매일 새벽 어디로 ‘팔려갈지’도 모른다. 현장(건설, 토목, 조경 등) 경험이 있는 일용직들에게도, ‘새로운 현장’은 그 경험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반드시 일정 부분 좌절감을 안긴다. 그러니 경험이 전무후무한 일용직의 좌절감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장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용역사무소에서도 경험자와 무경험자, 현장과의 조율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쩌면 일용직 노동자와 각을 세우고 있을 노동 현장, 그리고 그것을 조율해야할 용역사무소. 그 복합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혼돈.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는 여러 캐릭터가 울뚝불뚝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기자가 이들(현장, 용역사무소, 일용직노동자)과 마주한 시간은 흥미로웠고 풍요로웠고, 한편으로는 참담했다.

지난 회 기자 이야기에 이어 이번 회에는 용역사무소 ‘에이스’ 기민수(가명. 62)씨의 삶을 옮겨봤다. 기 씨는 용역사무소에서 ‘1인자’로 불린다. 대부분 현장 담당자들은 그가 나타나기만을 고대한다. 사무소 소장의 장부에는 ‘그가 가줘야 할’ 각 현장명과 그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을 정도다. 사무소에선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기 씨지만,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풀어봤다.

 

총책임자 버금가는 실력

현장이 기 씨를 요구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현장 최고 지휘관에 버금갈 정도로 못하는 일이 없다. 목수면 목수, 철근이면 철근, 설비면 설비, 청소면 청소, 모든 일들을 빈틈없이 처리한다. 때론 고층에서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할 철근 ‘시스템’ 조립이나 해체도 그에겐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용직 노동자가 할 수 없는 일까지 도맡으니, 현장에서는 비용절감 차원에서라도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용역사무소 노동자들도 기 씨와 현장에 가기를 고대한다. 이른 새벽, 기 씨가 등장하면 현장 담당자들이 깍듯이 모시는 덕분에 그와 함께 간 자신조차 존중받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현장에서는 작업지시를 하기 전 어떻게 작업을 하는 게 낫겠느냐며 기 씨의 의견을 물어보고 조율을 한다. 때론 지시를 받은 기 씨가 담당자에게 “이건 틀렸으니 지시를 다시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일도 있다.

“우리가 이 작업을 끝내면 다음 작업은 목수들이 해야 하는데, 목수들이 책임자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 있어요. 자신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지 않거든요. 그러니 간격을 더 넓혀야 해요.”

총책임자에게 기 씨의 의견을 타전하고 돌아온 담당자는 기 씨에게 경외감을 표한다.

“뭐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물론 기 씨 역시 현장 담당자에게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포클레인 등의 장비를 보조하며 무거운 돌을 옮겨야 하는 어느 석축 현장. 작업 시작 전 담당자와 사인이 맞지 않는 바람에 ‘기술도 기능도 없는 무기력한 일용직 노동자’로 오해를 사야 했던 것이다.

“용역사무소 소장 정말 안 되겠네. 내가 그만큼 나이든 사람들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지. 좀 제대로 된 사람 보내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수수료만 챙겨먹고 말이야. 앞으로 이 용역사무소와는 거래하면 안 되겠어.”

 

 

기 씨 면전에서 그렇게 구박을 줬지만, 작업 시작 후 1시간 쯤 지나자 담당자의 얼굴에선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기 씨의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현장담당자도 못하는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 초능력에 가까운 손놀림과 맥가이버에 견줄만한 일머리에 담당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휴식 시간이 되자 담당자는 기 씨 회유 작업에 들어갔다. 자신은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했으며, 포항 해병대 출신으로 많은 현장을 쥐어흔든다며 자기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다음 현장부터는 자신과 함께 일하자고 했다.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뜻이었다. 백령도 해병대에서 근무했던 기 씨는 자신의 이력은 숨긴 채 새파란 후배의 따분한 여담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현장을 이처럼 좌지우지하는 기 씨. 대체 이런 사람이 무슨 사연이 있기에 하필 용역사무소로 출근하는지 궁금해 질 수밖에 없다. 알고 보니 기 씨는 젊은 시절 대기업 건설사에서 일을 했고 중동, 아프리카 등지의 건설현장 일선에서 총지휘를 하는 등의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에게도 집안이 휘청거리는 시련이 있었고, 2년 전엔 부인과 사별해야 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은 중증으로 위태위태하다. 결혼한 외동딸은 미국에 거주중이어서 손 벌릴 곳도 마땅치 않다. 현재 기 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내가 지금 어디 취직할 형편이 안 돼요. 통장도 다 말소됐고….”
 

 

기 씨, 기자와 ‘절친’ 되다

흔히 하루 일과가 끝나면 상당수 노동자들은 사무소 인근 술집에서 허기를 달랜다. 마치 전우애를 다지듯 술잔을 부딪치며 전쟁과 같았던 하루를 돌아본다. 기자 역시 많은 이들과 술잔을 기울였고 그들의 애환을 기록해왔다. 그런데 유독 기 씨만은 베일에 싸여있는 존재였다. 그는 용역사무소 노동자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자신의 단골집에서 늘 혼자 술을 마셨다. 주변사람들은 늘 기 씨에게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야 했다.

“나는 혼자 마셔요. 그리고 사무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싫고….”

1인자의 위엄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 기 씨가 어느 날부터 소통을 시작했다. 상대는 바로 이 글을 쓰는 기자였다. 관심사가 비슷했고 정치 문화적 지향점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날은 용역사무소 소장이 기자를 불러 세우더니 기 씨의 동정을 물으며 기자와의 관계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저한테 물으면 어쩝니까. 나이차가 그렇게 나는데 무슨 친구도 아니고.”

“아니 근데 왜 그러지.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 어제 기민수 씨가 낮부터 술에 잔뜩 취해 사무소에 와서는 호통을 치더라고요. 그러면서 무조건 당신이랑만 일 보내달라고 하더라고요. 난 당신이 일 잘해서 그러느냐고 물었는데 그것도 아니라네. 그냥 인간이 됐다고 그러더라고요.”

1인자의 호통에 소장은 꼼짝할 수 없었다. 소장은 기 씨에게 되도록이면 기자와 일을 함께 보내겠다고 약속했단다. 그렇게 기 씨와 주로 현장을 다닌 기자는 기 씨를 보조하며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일을 함께 다녀도 매일 혼자 술을 마시던 기 씨.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은 귀가하려는 기자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하는 게 아닌가. 다들 기 씨와 술을 마시고픈 바람이 있었지만 성사된 적이 없었기에 기자는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기 씨와의 독대는 사무소 사람들에게 구경꺼리였다. 술집 창을 통해 지켜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도 그 자리에 끼워달라며 연락을 해오는 이들도 있었다. 기 씨는 그저 “아무도 부르지 말라”고만 했다. 그렇게 기 씨와 단 둘이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늘어갔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혼술’은 결국 중독으로

막노동 현장을 전전하는 기 씨지만 그는 지식인이었고, 지하 조직 성격의 사회주의 운동 단체 멤버였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저자인 홍세화 선생이 70년대 후반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태로 수배 당했을 당시 연루된 일도 있다. 홍 선생처럼 1급 수배자는 아니었지만 서울의 한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기 씨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당국으로부터 쫓겨 다녔다고 한다.

“나는 운동권 안에서도 한참 후배 뻘이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고, 그저 전단지 몇 개 옮겼을 뿐인데, 하여간 그 때 식겁했어요. 안 잡혀서 다행이었지, 일이 잘 안 풀렸으면 감방에 들어갔을 겁니다.”

기 씨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에 가깝다고 했다. 기 씨와 술자리를 하다 보면 남미와 유럽 혁명의 전개과정과 차이점 등이 주요한 대화 소재가 된다. 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물리학 등의 지식들을 펼쳐놓다 보면 웬만한 대학교수들보다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이런 기 씨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기 씨는 늦은 밤 기자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현재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병원에는 자주 들어갔다가 나오는 편입니다. 스스로 증상을 아니까 스스로 들어가야 해요. 가족이나 남에게 잡혀서 들어가면 나오고 싶어도 못나오거든요. 몸이 좀 회복되면 스스로 나올 테니 기회 되면 또 봅시다.”

기자는 기 씨에게 ‘혼술’ 만큼은 자중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그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다행히 기 씨는 술에 취해 실수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조용히 마시다가도 몸이 불편하다 싶으면 곧장 병원으로 향한다. 기자가 곁에서 그렇게 배웅한 횟수가 3회에 이른다.

“요즘 왜 기민수 씨 안 보여요?”

용역사무소 소장을 비롯 많은 이들이 기 씨의 행방을 묻는다. 한때 소장과 기자는 ‘기 씨가 (어딘가에서) 혼자 술 마시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이 술집 저 술집 그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소장 입장에서는 ‘에이스’ 하나 잃은 슬픔이 크다. 기 씨가 병원에서 나오는 날이 되어야만, 용역사무소는 또 다시 든든한 인적 자원으로 기세를 떨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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