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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돌담길, 역사는 흐른다

<역사탐방> 신라 고도 경주 샅샅이 훑기-4회/ 구혜리 구혜리 기자lrz_tes@naver.coml승인2018.01.1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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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촌한옥마을, 옛 정취가 살아나는 돌담 사이를 걷다

저녁 무렵이 되면 경주 역사유적이 한 데 모인 교촌한옥마을에 찾아가 봄이 좋습니다. 이제는 흡사 관광지의 모습이 되어버린 한옥이지만 그래서 더욱 다니기에 좋고 볼거리도 많아졌습니다. 교촌마을에는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 고택과 부근에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 내물왕릉 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라 그런지 오늘날에도 휘황찬란한 숍들과 순박한 옛 모습이 보존된 전통 상가들이 즐비해 둘러싸고 있습니다.

방문 당시 경주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습니다. 꽃향기를 따라 돌담길을 걷다보면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김밥집도 보이고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유명한 최부자집도 지나봅니다. 또 여기저기 곱게 한복을 입고 시간 여행을 나선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도 보입니다. 작지만 소박한 교촌한옥마을을 걷다보니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해가 거의 지평선 너머로 내려갈 즈음 돌담 바닥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켜집니다. 경덕왕 760년대에 만들어져 신라 최대의 돌다리로 전해지는 월정교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방문 당시 보수 공사 중이며 올 신년에 복원이 완성될 것이라니 경주에 다시 찾아올 명분이 하나 생긴 셈이지요.

 

 

경덕왕 14년에 흉년이 들고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향덕’의 부모도 병이 들었는데, 향덕은 먹을 것이 없어 부모가 굶주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에게 드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부모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경덕왕은 향덕의 효심에 감탄하여 큰 상을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손순 부부는 가난한 살림에도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그러나 어린 아들이 늘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자, 어머니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산에 묻기로 결심했다. 부부는 아들을 산으로 데려간 뒤, 아들을 묻을 구덩이를 팠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큰 종이 나와, 부부는 아들과 함께 집으로 종을 가져왔다. 종소리는 은은하고 고와 멀리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은 손순 부부에게 큰 상을 내렸고, 손순은 자신의 집을 ‘홍효사’라는 절로 삼아 종을 걸었다.

 

 

 

소박한 정취가 담긴 교촌한옥마을은 월성의 화려한 모습을 뽐내는 안압지와 붙여있어 다소 대비되는 매력을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두 문화재의 조화로써 옛 조상들의 모습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통일 이후 신라의 귀족과 평민의 삶의 모습은 극심히 나뉘어졌습니다. 통일을 이루며 귀족들은 노비와 토지를 거느리며 자연스레 전보다 풍족해졌지요. 하지만 평민들은 대부분 직접 땅을 일구며 힘들게 살았습니다. 특히 가난한 농민들은 귀족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고, 귀족에게 빌린 빚을 갚지 못하여 결국 노비가 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향덕과 손순의 이야기처럼 가난 속에서도 부모에게 효를 다한 백성에게는 왕이 큰 상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야 손순 부부의 이야기는 다소 기괴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대 조상들이 얼마나 孝를 값지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첨성대, 별에게 바라는 마음으로

한옥마을의 돌담길을 따라 가다 보면 국보 제31호로 지정된 첨성대가 있습니다. 흔히 천문 관측으로 알려진 첨성대의 용도에는 그 외에도 제단(祭壇)·기념물·불교관계 건축물 등 여러 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다만 통설로는 천문 관측이 우세하고 역법 제작과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한 점성 목적이 아니었을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첨성대를 둘러싸고 통제구역이 있지만 대체로 인근에 모여든 관람객의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입니다. 첨성대로 쏜 조명이 밝아 스스로 광채를 발하는 듯 자못 신비로운 기운을 풍깁니다. 첨성대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축제를 온 것 마냥 피크닉을 나온 마냥 힘이 넘칩니다. 기운을 받고 살아난 야시장 장터로 북적여 볼거리가 많으니 느긋이 별과 담소를 나눌 밤이 되겠습니다.

 

 

안압지, 왕과 왕비가 되어 물가에 흐르는 달빛을 담아보다

안압지는 경주답사를 계획하며 가장 고대했던 곳입니다. 수학여행으로 수차례 발 닿은 경주지만 안압지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늘 아쉬웠습니다. 안압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밤에 볼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교복을 벗은 오늘에서야 연인과 가족과 오순도순 손을 잡고 안압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신라 월성 북동쪽에는 ‘안압지’라는 커다란 연못이 있습니다. 이곳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만든 곳입니다. 본래 이름은 ‘월지’였으나, 신라가 멸망한 뒤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기러기 안(雁) 오리 압(鴨)을 붙여 ‘안압지’라 부르게 되었지요.

안압지에는 연못과 3개의 섬, 조화를 이루는 건물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신라인의 뛰어난 미적 감각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문무왕 이후 역대 왕들은 안압지 안에 있는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곤 했답니다.

안압지에서는 약 3만여 점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실생활에 사용되던 것이어서 당시 궁중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금동 가위와 봉황 장식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주 관광명소로 인지도가 높은 안압지는 외국 관광객에게도 인기인가 봅니다. 옛 임금과 비가 되어, 귀족이 되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사이 연못 위로 달이 헤엄칩니다. 인파에 등 떠밀려 보는 둥 마는 둥 걷던 동궁터를 지나 어느새 안압지 한 바퀴를 돌아 나옵니다. 천 년 역사의 화려함과 사람들의 꿈이 깃든 아름다운 경주였습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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