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 에세이> 고인돌

▲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지석묘

 

고인돌은 쉽게 말해 수 천 년 전의 공동묘지다.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며 몇 개의 받침돌 위에 한 개의 넓고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놓은 선사시대의 무덤양식이다. 계급분화가 시작된 청동기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힘 있는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에서 나온 돌화살촉이나 간검돌, 민무늬토기, 청동제품 같은 부장품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인돌은 크게 받침돌 위에 무덤방을 꾸미고 커다란 덮개돌을 올린 탁자 모양의 탁자식과 땅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놓은 뒤 큰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 그리고 땅속 무덤방에 받침돌 없이 덮개돌을 올린 개석식이 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과 중국의 랴오닝 지역을 중심으로 3만여 기가 집중돼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큰 강(한강이나 영산강) 주변의 평야나 낮은 구릉에서 볼 수 있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기원전 12세기쯤부터 기원전 3~2세기쯤까지 1000여 년간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3만여 기에 달하는 고인돌이 분포돼 있다고 한다. 고인돌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거대한 돌을 어떻게 운반하고 들어 올렸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주로 집단생활을 했던 당시 사람들은 평지, 구릉, 산기슭에서 살았다. 바위나 암벽이 있는 산 주위나 강가는 덮개돌을 구하기 쉬운 곳이었다. 암벽에서 덮개돌을 떼어내 옮길 때는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렸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 힘만으로 그 거대한 돌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끈, 지렛대, 통나무 같은 도구를 이용했을 거라고 말한다. 즉 통나무를 철길처럼 깔아 그 위에 돌을 놓고 밀어 옮겼으리라 추정한다. 그렇지만 이 방법도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고인돌을 통나무 위에 올려놓는 건 쉬울지 몰라도 모양이 울퉁불퉁한 돌을 굴리는 데는 엄청난 마찰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냇물을 건너거나 언덕을 올라야 할 경우엔 어떻게 했을까? 땅 속 무덤방의 구조는 발굴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지만, 덮개돌을 옮긴 과정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고인돌을 자세히 보면 가히 예술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인돌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받침돌 위에 덮개돌을 정확하게 올려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게 뛰어나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무게중심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고인돌은 무게나 형태로 보아 협동하지 않으면 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이렇듯 협동심이 강했고 타고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고인돌을 통해 당시 사회구조, 정치체계, 정신세계까지 엿볼 수 있다.

 

 

▲ 고창 도산리 마을에 있는 북방식 고인돌

우리나라 최대의 고인돌 유적지, 고창

고창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고장이다. 2000여 개에 달하는 고인돌은 고창을 세계 속의 도시로 각인시켰다. 먼저 고인돌박물관에 들러 고인돌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는 게 순서다. 지상 3층 규모의 박물관엔 기획전시실, 입체영상실, 청동기시대의 생활상을 묘사한 조형물과 대형 벽화, 세계 거석문화 소개 코너 등이 마련돼 있다. 옥상에는 대형망원경을 설치해 인근의 고인돌 유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박물관에서 가까운 아산면 상갑리와 고창읍 매산리에는 고창군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 가운데 50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고창 고인돌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북방식(탁자식), 남방식(바둑판식), 주형지석, 위석식, 지상석곽식 등으로 나뉜다. 특히 지상석곽식은 고창에서만 볼 수 있는 고인돌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무덤방을 만들었다. 많고 많은 고인돌 가운데 고창읍 도산리의 한 마을 뒤편에 서 있는 북방식 고인돌 한 기와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운곡 지석묘 한 기가 눈길을 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도산리 고인돌은 넓은 판석 2개를 세로로 세우고 그 위에 상석을 얹은 형태이다. 수 천 년 역사를 침묵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인돌박물관에서 4km 거리에 있는 운곡 지석묘는 높이 5m, 둘레 16m, 무게는 무려 300여 톤에 달한다. 어떻게 만들어 옮겨왔는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이렇듯 고창 땅에 선사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은 이곳이 그만큼 고대인들에게 살기 좋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산과 강, 기름진 평야, 그리고 바다와 인접해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까닭이다. 수렵 생활을 하면서 새 땅을 찾아 정착을 꿈꾸던 그들에게 이 땅은 분명 낙토였을 것이다.
 

보존 상태가 뛰어난 강화 고인돌

강화도는 가는 곳마다 유적이고 그 유적들은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이다. 그 중심에 고인돌이 있다. 강화 고인돌은 규모와 보존 상태에서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다. 강화도에는 고려산을 중심으로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고천리, 교산리 등지에 130여 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이 중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강화 지석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탁자식 고인돌로서 덮개돌의 길이가 6.4미터, 폭의 길이는 5.2미터, 높이는 2.6미터다. 측량 결과 덮개돌은 무게가 자그마치 53톤에 이르고, 좌측 받침돌 13톤과 우측받침돌 9톤을 합치면 총 무게가 무려 75톤에 달한다고 한다.

내가면 오상리에는 11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다. 그중 가장 큰 고인돌인 내가지석묘(인천시 기념물 제16호)는 길이 3.7미터, 넓이 3.35미터, 두께 50센티미터나 되는 덮개돌이 올려져 있다. 오상리에서 가까운 고천리에도 18기의 고인돌 무덤이 흩어져 있다. 이곳의 고인돌은 1기만 빼놓고 원형이 많이 마모돼 있다. 인근 능선에 돌을 채석한 흔적이 있어 고인돌 축조 과정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서는 해마다 가을 무렵에 고인돌 축제를 연다. 어린이와 가족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놀이와 교육이 겸비된 축제다.

강화도는 고대국가부터 조선 말기까지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울 땅의 절반쯤 되는 섬이지만 섬 안에는 고인돌을 비롯해 갖가지 문화유적이 즐비하다. 해서 사람들은 이 섬을 일러 ‘살아있는 국토박물관’이니 ‘숨 쉬는 역사 교과서’니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사실 이 섬을 찬찬히 둘러보면 이 같은 말이 그럴 듯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화순 핑매바위 고인돌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화순 고인돌

1995년 처음 발견된 화순 고인돌 유적지는 사적 제 410호로 지정됐다. 능주면, 도곡면, 춘양면 일대에 퍼져 있는 고인돌의 전체 면적은 강화도나 고창보다 넓다. 논이나 밭, 산기슭, 바위산, 고개 등 다양한 지형에 분포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곳에 있다 보니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것도 장점이다. 화순 고인돌은 기원전 5~6세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지석묘가 대부분이다.

도곡면 효산리에서 춘양면 대신리까지 이어지는 보검재 계곡 4㎞ 일대에는 고인돌 596기가 갖가지 사연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다. 이들 고인돌은 마을 앞 평지나 계곡의 동쪽 산기슭을 따라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다.

특히 춘양면 대신리의 보검재 정상 부근에 있는 일명 ‘핑매바위’는 이곳의 고인돌 중 가장 크다. 화순 고인돌은 바둑판식이 대부분이고 개석식 고인돌도 일부 발견되었다. 크기가 큰 고인돌이 많은 것도 화순 고인돌의 특징이다.

몇 년 전에는 고인돌 유적지에서 부장유물인 간돌검(石劍)이 출토돼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길이 133㎝, 너비 46㎝, 깊이 40㎝의 무덤방(石室)에서 발견된 간돌검은 발견 당시 한쪽 벽 부근에서 검의 끝이 위로 향해 있었다고 한다. 간돌검의 길이는 12.5㎝, 검몸 길이는 10.5∼10.6㎝이며 손잡이와 연결되는 부분 양쪽에 홈이 파여 있다. 고인돌유적지에서 간돌검이 발견된 것은 고인돌이 당시 무덤으로 활용됐음을 입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 화순 운주사 와불

 

화순에는 고인돌 못지않게 유명한 문화유산이 또 있다. 천불천탑의 전설이 어린, 도선국사가 창건한 운주사가 그것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해 놓을 만큼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평지에 들어선 절집엔 수많은 불상과 탑이 역사를 증언해준다. 절에 들어서면 맨 먼저 암반 위에 서 있는 커다란 9층 석탑이 반긴다. 하늘로 올라간 옥개석은 날렵하고 전체적으로 세련미를 한껏 풍기고 있다. 운주사의 탑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그 뒤로 몇 개의 석탑이 나란히 배치돼 있고, 돌을 쌓아 정육면체 모양의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2구의 돌부처를 앉힌 두 구의 석불좌상(석조불감)이 서로 등을 대고 마주한 채 바라보고 있다. 석조불감 뒤로는 지대석과 탑신, 옥개석이 모두 둥근 모양인 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이 보인다.

운주사에서 가장 눈길을 머물게 하는 건 누워있는 불상, 와불이다. 동자승의 장난으로 미완성이 된 두 와불은 나란히 누워 있어 부부와불로 불리기도 한다. 그 표정이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데 문득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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