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 필요한 건 보온병 안의 물 한 잔과 따뜻한 손길일 뿐”
“우리에 필요한 건 보온병 안의 물 한 잔과 따뜻한 손길일 뿐”
  • 최규재 기자
  • 승인 2018.01.1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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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두려운 사람들> ‘동장군과 거리서 사투’ 노점상 할머니들

‘완전 복장’으로 거리로 나선 할머니 노점상들의 겨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자아낸다. 저 연세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쌩쌩 불어오는 찬바람과 맞서며 버티는 거리의 할머니들이 안쓰러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인한 ‘어머니 상’과 같다. 추울수록 ‘독해지는’ 거리의 할머니들을 찾아 나섰다.

 

“손에 쥐는 돈 1만원도 되지 않아”

 

“3개에 1000원! 10개엔 3000원~!!”

감자, 홍당무, 옥수수 등 각종 야채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다. 공기 좋은 시골에서 직접 재배했다는 야채를 바닥에 깔고 목청을 높이는 정지숙(82) 할머니. 매서운 바람이 전신을 할퀴고 가지만 할머니는 아랑곳 않고 오는 손님 가는 손님 붙잡느라 여념이 없다.

“아차산 부근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어. 자라나면서 죽어버리는 것도 많지만 농약은 절대 안 뿌려. 먹어본 손님들은 바로 알지. 싱싱하거든.”

상품성은 있다지만 손님들의 발걸음은 쉽사리 멈추질 않는다. 추위를 피해 인근 마트나 백화점으로 향하기 일쑤다.

“집에 갈 차비만 벌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뭘 바라겠어. 3평 남짓 지하방에 사는데 올 겨울은 보일러를 자주 틀고 있어.”

오가피 묶음을 5000원에 파는 김행자(81) 할머니는 지나치는 손님들 잡느라 바쁘다. 중년 남성이 오가피에 슬쩍 눈길을 주고 지나치자 “총각, 4000원에 해줄게”라며 붙든다. 이 남성은 잠시 멈칫한 뒤 다가온다. 할머니의 ‘총각’ 넉살이 먹힌 모양이다.

“총각, 이거 강원도 오가피야. 4000원이면 싸게 사가는 거야.”

‘총각’은 값을 깎으려 한다. 할머니는 단호하게 그 이하는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나도 먹고 살아야지. 여기서 더 깎으면 본전도 못 찾아. 총각, 나도 오늘 석유 값은 벌어가야 될 거 아녀.”

할머니는 두 묶음을 사면 다른 야채도 함께 곁들여 주겠다고 회유한다. 남성은 마지못해 두 묶음 계산을 치른다. 곁들이 야채는 받지 않았다. 할머니는 가시오가피 외에 상추와 찹쌀 등을 깔아놓고 행인들의 시선을 끌어보려 하지만 초라한 좌판에 눈길도 주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매서운 칼바람, 할머니의 추위를 막아주는 것은 겹겹이 껴입은 ‘완전복장’ 뿐….

할머니의 점심은 항상 집에서 싸오는 차디 찬 도시락이다. 좁아터진 좌판, 찢어진 종이상자를 방석 삼아 하루 종일 앉아 있지만 집에 갈 때쯤 손에 쥐는 돈은 채 1만원이 되지 않는다.

“겨울엔 만원도 안 돼. 하루 만원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남들 복 타고 태어날 때 난 무엇을 타고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남편과 사별한지 이미 30년이나 지난 할머니는 이곳 경동시장 인근 답십리에서 혼자 산다. 출가한 자녀들이 셋이나 있지만 손 벌리기에는 그들 형편 역시 여의치 않다는 것을 할머니 스스로 너무나 잘 안다. 거리로 나선 이유다.

옆에서 나물 등을 내놓고 파는 권말숙(75) 할머니도 발길을 대형 백화점 등으로 돌리는 행인들에 애만 탈 뿐이다. 매일같이 나와도 하루 5000원에서 8000원 버는 게 고작이다. 할머니는 주변의 상인들 장사가 안 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붕어빵 장사도 국화빵 장사도 모두 안 돼 애가 탄단다.

“최근엔 특히 날씨가 추워서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어. 죄다 승용차 끌고 마트나 백화점으로 갈 뿐이지. 운이 좋은 날이 있기도 해. 승용차 끌고 가던 사람이 차에서 내려서 급하게 사갈 때지. 그런 사람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흥정하거나 깎을 엄두도 안 내고 제 돈 주고 사가.”

할머니는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 그날 장사가 될지 안 될지 판단이 선다고 했다.

“점심 먹고 두어 시간 앉아 있으면 ‘통밥(가늠)’이 나와. 더 있어도 될지 안 될지 말이야. 손님 없다 싶으면 일찍 접고 집에 가야해. 괜히 차가운 데서 오래 앉아 있다가 병나면 약값만 아깝잖아. 아무리 ‘통뼈’라도 나이가 있으니….”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인근 대학 앞 포장마차도 요즘은 매상이 예년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대학교 앞 노점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는 고미숙(70) 할머니는 노점상을 운영한 뒤로 벌써 10번째를 넘긴 겨울을 맞고 있지만 해마다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음식은 따뜻하더라도 찬바람 속에 하루 종일 서있다 보면 온 몸에 쥐가 나. 그렇더라도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는 하루 11시간, 12시간씩 장사를 할 수 밖에 없어. 그런데 지금은 방학이라 장사가 더 안 돼. 바람을 막아줄 비닐장막만 있어도 사정이 좀 나아지겠지. 여기 이러고 있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어. 따뜻한 밥 한 끼 먹는 일이 더럽게 힘드네 그려.”

“도시락 싸와봤자 얼어서 먹지도 못해”

 

할머니들이 겨울철 칼바람을 참아가면서 좌판을 벌리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다. 하지만 결코 녹록치 않다. 바깥에서 오래 있다 보면 이곳저곳 몸이 쑤셔와 집에 가는 즉시 곯아떨어진다.

“TV나 신문을 볼 겨를도 없지. 집에 가면 죽 한 사발 먹고 바로 잠들어. 새벽에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둬야지. 이러니 요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그래도 오다가다 듣는 얘긴 있어서 알만한 것들은 알지. 여기저기서 노점상 단속하는 거나 상인들 괴롭히는 내용들을 자주 들어.”

할머니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오로지 단골이다. 단골은 거짓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단골들은 때가 되면 와. 약속은 안 하더라도 항상 와서 팔아주지. 그 사람들이 내겐 정치인들보다 귀한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 없으면 나도 없어.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지. 몰라, 대통령이 혹 내 단골이 되면 귀히 여길지도….”

귤을 파는 박점순(75) 할머니는 점심 식사도 귤로 대신한다. 할머니는 “도시락 싸와봤자 얼어서 먹지도 못한다”며 “차라리 이게 낫다”고 했다. 보온병만은 항상 챙기고 다닌다는 할머니는 따뜻한 물 한잔이 유일한 낙이다.

“담배 한 대랑 따뜻한 물 한잔으로 버티는 거야. 누구한테 빌어먹을 생각 없어. 아무도 우리 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 점포 가진 시장 상인들처럼 터가 잡혀 있는 것도 아니고, 멀쩡한 거래처가 있는 것도 아니니 하루하루를 독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해.”

할머니는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거 때마다 투표소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투표할 시간에 1000원 짜리 하나 더 버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바뀌는 건 없어. 투표해서 사는 게 나아졌다는 소리 못 들어봤어. 계속 이러고 살다가 죽겠지. 나이든 노인들 다 똑같지 뭐. 그런데 영감들은 투표 참 열심히 하더라고. 하긴 그나마 영감들은 우리 할매들보다 상황이 좀 낫잖아. 특별한 기술 없어도 어디 가서 경비라도 설 수 있으니. 할매들은 받아 주는 곳도 없어. 평생 이러고 살아야 돼. 그날 그날 벌이가 있어야지.”

노점상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변화 같은 건 포기한지 오래”라고. 추운 겨울, 노점상 할머니에게 필요한 건 보온병안의 물 한 잔과 같은 따뜻한 손길일 뿐, 정치인들의 그것이 아니다. 그저 마트나 백화점 가는 서민들의 발걸음이 자신의 노점 앞에서 멈추어지길 바랄 뿐이다. 최규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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