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머슴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면서 TV에서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학교에 들어갔다. 일곱 살 때 일이었다. 사실은 여덟 살이 되어야지 입학이 가능했다. 아버지를 졸랐다.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다른 형제가 없었다. 늘 혼자이다보니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고, 학교에 빨리 가고 싶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그리고 특히 나에겐 어머니가 안계셨다. 이와관련한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들려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로지 아버지와 둘이서만 생활을 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전에 얘기했듯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셨다. 물론 거기엔 어머니가 안계신 것도 작용을 했으리라. 외로우셨고 그래서 술로 달래려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하나 있는 아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7살이 되던 해 늦겨울 내 손을 잡고 무작정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를 찾아갔다. 광선초등학교. 가는 길은 상당히 멀었다. 10리 길이었다. 눈보라 치는 논밭을 지나고 산 등성이 고개를 넘고, 또 한참을 가야 학교에 닿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무작정 교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나와 아버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시던 교장선생님은 결국 입학을 승낙하셨다.

그리고 3월 2일, 따뜻한 봄햇볕이 내리쪼이는 날이었다. 난 동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학식에 참석했다. 가는 길은 따뜻해진 날씨 때문인지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얼마전 새로 산 검은고무신에 진흙이 달라붙어 자꾸 벗겨질 정도였다. 난 그럴 때 쓰는 비상수단을 알고 있었다. 논에 나뒹구는 볏짚 몇 가닥을 꼬아 고무신을 발에 칭칭 동여매는 것이었다. 다소 불편하긴 했으나 신발이 벗겨지는 것보단 나았다.

 

▲ 사진=pixabay.com

 

가슴엔 삼베로 만들어진 손수건과 아버지가 전날 손수 만들어주신 커다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니 많은 애들이 모여 있었다. 입학식 때문에 전교생이 모여 있는 것이었다. 운동장도 진흙투성이긴 마찬가지였다. 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신입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몇몇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모두들 상당히 흥분된 모습들이었다. 잠시 뒤 입학식이 치러졌고, 반 배정이 이뤄졌다. 선생님 뒤를 따라 우리가 다음날부터 공부할 교실을 구경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토록 어린 나를 설레게 했던 초등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정작 학교 생활은 아쉬움만 남는 시기의 연속이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날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것도 5학년 초가 되어선 아예 그만두어야만 했다. 기껏 학교에 간 날이라곤 1년에 반 정도나 됐을까.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장 나들이를 계속 하셨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시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런 아버지가 걱정됐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도 술에 취해 장터 어딘가에서 쓰러져 주무실 아버지 걱정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땐 선생님 몰래 책보따리를 챙겨 도망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장터로 달려갔다. 예상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훤한 대낮인데도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는 때론, 사람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고, 또 때론 장터 골목 한 구석에서 쓰러져 있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어떤 행사가 있을 땐 특히 가슴이 아팠다. 운동회가 열리거나, 소풍을 가는 날 등….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들과 함께 맛있는 도시락을 먹곤 했는데, 난 항상 혼자였던 것이다. 거기다 도시락은 감히 생각도 못할 것이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자리에 동행하지 않았다.

학교에 내는 육성회비도 문제였다. 말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집 형편상 육성회비를 낸다는 건 요원한 일이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독촉을 받고 몇차례 아버지에게 얘기를 했지만, 돌아오는 건 한숨소리 뿐이었다. 나중엔 아예 입밖에 꺼내는 걸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 하나.

어느날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운동장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등장했다. 아버지였다. 그런데 세상에 아버지 등에 매여 있는 커다란 짐. 바로 지게에 땔감나무를 한가득 지고 오신 것이었다. 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내 학교 관사에서 살았던 교장선생님 댁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육성회비 대신 땔나무를 해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난 너무 창피했다. 친구들 입에서 "야, 덕희 아버지 아냐?"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내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가 돼 버렸다. 결국 교실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학교 뒷산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수업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한참이 지난뒤에야 교실로 내려왔다. 다른 애들에게 얼굴을 비추기가 싫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