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 스웨덴 국회의사당 전경

 

1986년 2월의 마지막 날인 28일 금요일 저녁. 스톡홀름의 중심 도로 스베아배겐(Saeavägen) 45번지에 있는 영화관 ‘그랜드(Grand)’에서는 스웨덴 코미디 영화 ‘모차르트의 형제들(Bröderna Mozart)’이 상영되고 있었다. 두 번에 걸쳐 12년간 스웨덴의 총리를 지내고 있는 올로프 팔메(Olof Palme)는 이 날 부인 리스베트 팔메(Lisbet Palme)와 함께 둘째 아들 모르텐(Mårten) 내외를 만나 이 영화를 봤다.

저녁 9시경 시작한 영화는 11시가 조금 넘어서 끝났다. 영화관 앞에서 아들 내외와 헤어진 팔메 부부는 영화관에서 멀지 않은 회토리엣(Hötorget)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팔메의 경호원은 이미 오전 11시 퇴근했다. 평소 근무 시간이 아니면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 팔메는 금요일이고 2월의 마지막 날에는 다른 때보다도 일찍 경호원을 퇴근시킨 것이다.

팔짱을 끼고 천천히 스베아배겐을 걸어 42번지 앞에 다다랐을 때 금요일 밤의 한적한 공기를 가르는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스웨덴은 개인의 총기 소지 자유가 주어지는 나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처럼 심심찮게 총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그 차가운 총소리와 함께 팔메가 쓰러졌다. 첫 번째 총소리에 총탄은 그의 등에서 가슴 위쪽으로 관통됐다. 리스베트를 향했던 두 번째 총소리는 허공을 갈랐지만, 팔메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놀란 리스베트는 쓰러진 팔메를 몸으로 덮었다.

 

▲ 스웨덴 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올로프 팔메 전 총리의 청동상

 

스웨덴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 올로프 팔메.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로 일컬어지던 영세중립국 스웨덴에서 그는 한밤중에 암살을 당했다. 누구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일이다.

오는 30일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와 복지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올로프 팔메 전 총리가 태어난 지 91주년 되는 날이다. 자신이 사망한 날과 한 달 차이다 보니 스웨덴에서는 이 무렵부터 팔메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일부에서는 1월 30일부터 2월 28일까지를 ‘팔메 일생의 달(Palme Livsmånad)’이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각종 세미나와 토론을 하기도 한다.

특히 그가 공부한 스톡홀름 대학교 경제학과는 물론 정치외교학과 등에서도 팔메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이 열리곤 한다. 뿐만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등의 진보 정치 포럼과 사회민주주의 모임, 그리고 팔메가 완성한 스웨덴 복지 정책에 대한 학술 세미나가 열리기도 한다.

1969년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로부터 총리 자리를 물려받은 팔메는 1976년까지, 그리고 1982년부터 1986년까지 2차례 총리를 역임하면서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와 복지 정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헌법 개정을 통해 그때까지도 헌법상 전제군주국가였던 스웨덴을 입헌민주주의 국가로 바꿨다. 등극한지 얼마 안 된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브 16세로부터 영국이나 노르웨이, 덴마크의 국왕들도 가지고 있던 제의주도권을 빼앗기도 했다.

또 타게 에를란데르 때 강화됐던 고용유연성을 고용보장 강화로 바꾸었고, 유럽 평균보다 낮았던 조세부담률도 세계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보편적 복지를 강화했다. 그래서 스웨덴 복지 정책이 가장 진보적이었던 때가 올로프 팔메 집권기라고도 얘기한다.

 

▲ 1986년 2월 28일 암살된 올로프 팔메가 총을 맞은 스베아베겐 42번지 ‘올로프 팔메 미네스팔라츠(Olof Palmes minnesplats)’에는 ‘이 장소에서 암살당했다.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 1986년 2월 28일’라고 적힌 동판이 있다.

 

사민주의와 복지, 노동에 이르기까지 스웨덴의 모든 것이 팔메 시대에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시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 실각의 시기를 보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메는 스웨덴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규정됐다. 더구나 스웨덴 귀족 집안 출신이고, 가난이라고는 알 수도 없는 환경에서 자란 그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팔메의 죽음은 그가 암살된 지 32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미제 사건이다. 범인에 대한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원래 팔메의 암살 사건 수사는 2011년 2월 28일 영구 미제사건이 될 수 있었다. 스웨덴은 살인에 대한 공소 시효가 25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메의 사건은 특별 범죄에 대한 공소 시효를 없애기로 함에 따라 현재까지도 수사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스웨덴 시민들은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는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 사건 초기 수사를 맡았던 경찰도, 이후 사건 수사를 이관 받은 스웨덴 비밀경찰 세포(Säpo. 우리의 국정원에 해당)도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단서하나 잡지 못하고 있다. 사건 당시 대여섯 명의 목격자가 범인을 봤고, 3월 1일과 2일에 걸쳐 범인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 간 팔메 암살의 배후에 대한 음모론만 그치지 않는다. 소련 친화적인 팔메를 고깝게 생각한 미국 CIA가 벌인 일이라는 추측에서부터 팔메의 사회주의적인 정책에 브레이크를 걸려던 극우세력의 사주,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추종자의 범죄, 유럽 군수산업계의 사주, 쿠르드 노동자당의 소행 등등.

 

▲ 1985년 9월 총선에서 연설하고 있는 팔메. 단상에 ‘노동, 환경, 민주주의, 우리는 건설 노동자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올로프 팔메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없다. 팔메에 대한 사회민주주의 입장의 관심도 최근 10여년 사이에 급격히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각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에서 나오는 논문을 제외하고는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책이라고는 2012년 출간된 하수정 씨의 ‘스웨덴이 사랑하는 정치인 올로프 팔메’ 정도다.

팔메의 살인범은 과연 잡을 수 있을까? 진짜 스웨덴 정부는 이 사건을 해결할 의지가 아직 남아 있을까? 남녀노소를 막론한 스웨덴 사람들이 아직도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사건은 영구 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가 자신이 진짜 팔메의 암살범이라고 나서기 전에는. 하긴 지금까지 150여명이 ‘내가 팔메를 쐈다’는 주장을 해왔기에 진짜 암살범이 나타난대도 입증할 가능성은 별로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메 탄생 91주년, 서거 32주기가 되는 1월 30일부터 2월 28일 ‘팔메 일생의 달’에는 팔메 연구와 함께 그의 암살범에 대한 관심의 불씨도 지펴질 것이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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