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류승연

내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의 구축. 슬슬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뤄질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저출산 문제도 해결하고 여성 인력의 사회 진출도 활성화시키기 위해선 아이 돌봄을 마냥 개인의 일로 미뤄두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장애 아이를 키우면서 프리랜서로 틈틈이 일하고 있는 아이 엄마가 어쩌다 사회적 시스템 구축이라는 제도적 문제를 거론하게 되었을까? 최근 아들이 장애인 활동보조인에게 학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눈이 번쩍 뜨인 탓이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내 아이를 맡긴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한 것이다.

지난해 말 아들은 하교 후 치료실로 이동하던 중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활동보조인에게 머리와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다행히 아는 동생이 주차장에서 나오다 현장을 목격해서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 일러스트=정다은 기자 pandaa57@weeklyseoul.net

 

사람이니까 화나서 그럴 수도 있다고 넘어가 버리기엔 피가 거꾸로 솟는다. 아직 말도 못하는 아이를 때린 것이기 때문에 분노 또한 더 크다. 그동안 내가 없는 곳에서 얼마나 때려왔을지, 그 시간을 아들은 어떻게 견뎌왔을지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이다.

활동보조인에 의한 학대사건은 그녀가 발달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일어난 탓이 컸다. 활동보조인 양성 기관에서 며칠 동안 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딴 뒤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발달장애에 대한 전문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우리와는 다른 감각체계와 인지회로를 갖고 있는 발달장애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처럼 말로 지시한다 해서 곧바로 알아듣고 이해를 하지 못한다. 말을 못하는 아이가 몸으로 거부의사를 밝힐 땐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관찰력과 이해력, 정보력이 있어야 한다. 발달장애에 대한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그만둔 후 새로운 활동보조인이 왔다. 새로 온 활동보조인 역시 이제 갓 교육을 마친 새내기 아주머니다. 친정엄마 또래의 그녀는 손주를 오래 돌봤기 때문에 아이 키우는 것은 자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아들은 활동보조인의 손주와 다르다. 지적장애 2급의 발달장애인이다. 아마 손주를 돌보면서는 듣도 보도 못한 돌발 상황에 수없이 노출될 것이고 당황도 할 것이다.

성격은 너무 좋다. 선하고 착한 마음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아주머니다. 하지만 장애인 활동보조인을 하기에는 결격 사유가 있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60대 중반의 그녀는 무릎이 안 좋다. 빠른 걸음을 걷지 못한다. 아들이 조금만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면 천천히 가라며 아들의 옷을 붙잡는다.

자기는 앞으로 걸어갈 뿐인데 못 걸어가게 제압하는 어른이 아들은 밉다. 상황이 이해도 안 간다. “잉잉~” 그러며 벗어나려고 한다. 거리 한복판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무릎만 안 좋으면 다행이다. 그녀는 체력도 약한 편이다. 힘도 없다. 뿌리치는 아들을 붙드는 것도 힘에 겹다. 눈 깜짝할 새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를 하는 아들인데 그런 상황이 왔을 때 그녀가 아들을 쫓아갈 수 있을지, 팔이라도 잡아 저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활동보조인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만 아들을 맡길 수가 없다. 아들이 치료실을 갈 때마다 나까지 따라붙어 셋이서 함께 다닌다. 활동보조인을 활용하는 의미가 없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활동보조인이라는 게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특별한 자격 없이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노느니 돈이나 벌자.” 첫 번째 활동보조인도, 두 번째 활동보조인도 웃으면서 내게 했던 말이다. 나는 아이를 맡겨야 되는 상황이니 웃으면서 그 말에 호응해줄 수밖에 없다.

아이를 믿고 맡길 데가 없다는 것은 굳이 장애 아이 가정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직장에 다니는 여동생도 작년에 황당한 사건을 겪었다.

공무원인 여동생은 조카가 세 살 때 회사에 복직을 했다. 아직 어린 조카를 어린이집에 저녁 늦게까지 맡길 수는 없어서 아이를 돌봐주는 이모님을 구했다. 이모님은 오후 3시에 어린이집에서 조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간식을 먹이고 목욕도 시킨 뒤 저녁밥을 먹이고 나면 여동생이 퇴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모님이 조카를 목욕시키고 있는데 마침 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차 안의 냄새를 빼기 위해서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온 게 생각이 났다고. 네 살 밖에 안 된 어린 조카를 욕조 안에 혼자 내버려둔 채 차의 창문을 닫으러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아직 어린 아이를 욕조 안에 홀로 내버려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아이들은 얕은 물에서도 얼마든지 사고가 날 수 있다. 더 황당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창문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만 한 나머지 자동차 열쇠만 들고 뛰어 내려간 그녀.

차의 창문을 닫고 나서야 현관 열쇠와 핸드폰을 모두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집에 가서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 보지만 욕실 안에 혼자 있는 조카가 반응할 리 없다. 여동생과 연락할 방법도 없다. 그녀는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운전하고 어린이집으로 갔다. 어린이집 교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나서야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여동생은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줬고 그 후에야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단다. 대략 한 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네 살짜리 조카가 욕조 안에 홀로 있었다.

다행이 차갑게 식어버린 물 안에서 오랜 시간 있느라 독한 감기가 걸려버린 것 외에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었다. 물속에 있는 것도 위험했지만 혼자 있는 게 무서웠던 조카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리기라도 했다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녀 역시 친정엄마 또래의 아주머니였다. 자녀들도 다 컸고 집에서 노느니 돈이나 벌자는 생각으로 아이 돌봄 일을 하고 있었다 한다.

실제로 많은 엄마들은 일을 하기 위해 아이를 돌봐줄 이모님을 구하려 하면 젊은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 돌봄이라는 게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자리의 하나가 된 것이다.

물론 나이 든 여성들도 일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녀들을 위한 일자리도 확충되어야 하고 새롭게 개발되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자식을 키워봤다’는 이유로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아이 돌봄 일을 하는 것에는 반기를 든다. 남의 아이를 돌본다는 건 장애, 비장애를 떠나 엄마 노릇 이상의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성이 없고 프로의식을 가지지 않으니 장애인 돌봄에서도 비장애인 돌봄에서도 여러 사고가 일어난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것도 어린아이들을 키워내는 일이다. 자기 자식도 아니다. 남의 자식이다. 더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고 신경도 써야 한다. 적어도 직업의식이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 돌봄 일이 전문성을 띨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화되기를 바란다.

현재 장애인 활동보조인은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감독을 하고 있지만 실제 활동보조인을 교육해서 양성해 내는 건 위탁받은 외부업체들이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관리의 업무만 한다. 그러다보니 교육도 엉성하고, 실습도 엉망이며, 각종 불법사례가 판을 쳐도 관리감독이 제 때 이뤄지지 못한다.

비장애 아이들의 경우엔 대부분 민간단체를 통해 이모님을 소개받곤 한다. 각 지자체에서 하는 돌봄 서비스가 있긴 하지만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적어 오랜 시간 대기를 해야 하는 실정이란다. 또한 일할 곳이 넘쳐나는 이모님들의 경우 ‘집에 강아지가 있으면 가지 않겠다’ ‘매일 마시는 커피를 특정 브랜드로 제공해 달라’ ‘요리는 하지 않겠다’ 등 까다로운 사항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엄마들은 그에 맞춰줄 수밖에 없다고.

뭔가 체계적이고 신뢰할 수 있을만한 국가적 제도의 확립. 나라가 책임지는 아이 돌봄 서비스. 그로 인해 전문화된 돌봄 제공자 육성. 이런 것들이 이제부터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경단녀(육아로 인해 경력 단절된 여성)’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에서 저출산 문제도 사라진다. 제도적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이런 게 바로 실질적이면서도 시급한 복지일 것이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