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1회

한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회자됐다. 비루하고 왜곡된 교육현실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100명이 넘을 정도였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출범 당시의 일이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의 세습과 경제 양극화의 심화로 교육을 통한 계층 간 이동도 불가능해졌다. 신분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던 ‘희망사다리’마저 끊어졌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로 학급 감축도 불가피한 상황이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특권층을 위한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교육 양극화의 정점을 찍었다. 강남 부유층 자녀를 위한 자립형 사립학교와 특권학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상층 1% 자녀만 다니는 특수학교의 학비는 연 2000~4000만 원에 달한다. 대학보다 비싼 말 그대로의 금수저 학교다. 촛불시민들이 이 왜곡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촛불정부를 출범시켰지만, 교육 적폐 청산은 답보상태다.

 

▲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

 

“엄혹한 군부정권 하에서 출범한 전교조는 참 세상을 못보고 하늘로 간 아이들의 한(恨)을 품고 탄생했다. 참된 민주교육, 인성교육은 사라지고 기형적인 1% 특권학교가 판을 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99%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고 질 높은 참교육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창익 위원장의 얘기다. 전교조 출범 당시 사회는 군부독재시대였다. 노조 설립을 허가해줄리 만무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출발한 전교조는 김대중 정부에서야 합법노조로 승인받았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이 다시 법외노조로 내몰았다.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현 정부가 해결해줄 것을 바랐지만 아직까지 변한 건 없다.

조 위원장은 “공약한 노동인권이 퇴색한 느낌이다. 지난해 촛불광장에서 확약했던 전교조 법외노조와 교사기본권 문제만큼은 잘 풀릴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다. 교육개혁 동반자로서 새 교육, 새 학교를 만들겠다는 기대감도 컸지만, 아직까지도 미결상태”라고 토로한다. 1987년 민주항쟁 무렵 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교육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가 30세에 군부정권에 의해 해직된 이후 지금까지도 해직 상태다.

조창익 위원장을 서대문의 전교조 사무실에서 만나 법외노조 문제와 교사기본권, 노동기본권, 교육개혁 등에 대해 들어보는 자리를 만들었다. 다음은 심층인터뷰 전문이다.

 

- 전교조는 현재 법외노조인 처지다. 전교조 탄생 때 얘기부터 다시 들어보고 싶다.

▲ 군사정부 당시인 1989년 5월 28일에 태어난 전교조가 추구해 온 교육의 핵심 기치는 민족교육과 민주교육, 인간교육, 세 가지다. 당시 왜곡된 교육체제로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던 암울한 시대였다. 전교조는 그 자살한 아이들의 한을 품고 태어난 조직인 것이다. 피울음을 삼키면서 아이들 앞에서 죄인이 된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수없이 고민했다. 전국교사협의회를 만들어 정부에 강력히 교육개혁을 요구하기도 하는 등 제도개선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군사정권의 가혹한 탄압 앞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출범 초기에는 해직교사들이 모인 불법노조로 시작했기 때문에 정당성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합법적인 노동단체가 절실해졌다. 그렇게해서 전교조는 1989년에 정식 발족됐다. 노태우 정권은 중학교 교사였던 저를 포함해 1527명의 교사들을 쫓아내는 교육대학살을 자행했다. 사학까지 합쳐 1600여 명의 교사들이 불법 전교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 군부정권은 시골마을부터 두메산골, 섬마을, 서울지역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교사들을 모두 색출해 쫓아냈다. 전국 250여 개 시와 군, 구, 읍, 면 등 1만여 개 학교에서 쫓겨난 해직교사들이 도처에 넘쳐났다. 이 일은 전교조가 만들어진 1989년 5월부터 8~9월에 걸쳐 일어났다. 부부교사가 해직되었고, 조직의 와해로 생계가 막막해진 교사들은 학원에 나가거나 일부는 교직을 떠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뜻있는 15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조직에 남아서 전교조 재건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현직교사 등 1만여 교사들도 뜻을 모아 조직재건에 힘을 보탰다. 노조와 연결이 단절된 학교들을 찾아가 교장선생님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방문이 쉽지 않았다. 군사정권 하에서 해직교사가 방문하면 교장이 ‘빨갱이’로 몰아 고발하거나 못 오게 방해했다. 그런 악조건들이 많았지만 학교장을 만나 차근차근 설득해 나갔다.

 

- 전교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난 전교조는 군사독재정권 전선에서 민주주의를 꿈꾸고 태어날 때부터 저항의 유전자를 가진 조직이다. 그런 저항이 숙명적 과제로 국민들에게 애초부터 인지된 게 사실이다. 새로운 사회와 교육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컸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 전반의 지체현상 등과 맞물려 전교조도 똑같이 새 교육에 대한 책임주체로서 책무를 완수하지 못한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9년에 걸친 무도한 탄압과 국정원을 비롯한 기관들의 공작정치에 의해 정밀하게 기획된 전교조 말살 정책을 겪으면서 전교조는 저항적 이미지로 다시 부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우익언론들의 부정적이고 편파적인 보도로 나쁜 이미지가 더해져 은연중에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교조는 참교육 정신을 가슴 속에 깊이 새기고 아이들과 함께 국민과 함께하는 전교조로 거듭나도록 노력할 것이다.

 

- 학부모들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 1989년에 태어난 전교조는 1999년까지 10년 동안 사실 법적근거가 없는 조직이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가 합법노조로 승인했다. 그렇게 해서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왔다. 그런데 2016년 1월 1일 박근혜 정권이 느닷없이 법외노조로 내몰았다. 전교조는 반대시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학부모들이 말하는 것은 교사들이 학교수업을 소홀히 한 채 거리 밖으로 나와 집단행동 한 것을 우려한 것이다. 전교조는 왜곡되고 삐뚤어진 우리나라 교육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사회적 지지를 얻기 위해 정부에게 법외노조 규정의 부당성을 주장한 것뿐이다. 이와 함께 지난해 촛불혁명 당시 법외노조 문제와 교원평가 문제, 성과급 문제 등 3대 교육적폐의 해결을 촉구하는 단체행동을 했다. 촉구행동을 하려면 교사들이 연가(年暇)를 내야했다. 연가란 교육부가 인정한 것으로 1년에 23일을 쉴 수 있는 교사 고유의 권한이다. 교사들이 연가를 낼 때는 1주일 전쯤에 요일을 맞춰 다른 과목과 수업을 바꾸는 형식으로 한다. 예를 들어 금요일 수업이면 월, 수, 목요일에 맞춰 하는 식이다. 따라서 학생수업권 침해는 전혀 없다. 교사들이 한꺼번에 단체집회에 몰려나오니까 학생수업을 안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 법외노조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 전교조에 해직 교원 9명을 노조원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2013년 10월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 법외노조 통보를 했고, 전교조는 취소하라는 소송을 냈다. 긴 법정 다툼 끝에 2016년 1월 법외노조 판결이 내려졌고, 마지막 대법원 최종 판결만을 남겨 놓고 있다. 하지만 올해 안에 판결이 날지도 불분명하다. 과거 판례를 보면, 노조 내에 소수 해직교사가 있다는 이유로 합법적으로 보장 받아야 할 노동조합 자체를 법외노조로 못 박는 것이 헌법 상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례가 있었다. 과거 서울시 전교조에서도 있었다. 당시 서울시는 34명 노조원 중 4명의 해직자가 있다는 이유로 노조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대법원은 합법노조로 판결했다. 이번의 법외노조 사안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그와 같은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게 우리의 입장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전교조 법외노조 결정이 국제적 상식규범에 입각해서 반드시 철회되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전달하기도 했다. 600일 동안 정부와 법원도 표류하고 있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데다 대법원도 부담스런 눈치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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