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시계가 있는 풍경 ①

<몇 해 만인가 골목길에서 마주친/ 동갑내기 친구/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얼굴/ 나는 친구에게/ 늙었다는 표현을 삼가기로 한다/ 이 사람 그 동안 아주 잘 익었군/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진 친구의 손을 잡는다/ 그의 손아귀가 무척 든든하다…> (나태주, ‘악수’ 중)

그 곳이 기울어가는 헛간 지붕 위일지언정, 허물어져가는 흙담 위일지언정, 땅바닥일지언정 이 호박들도 저를 지나간 일월성신을 아로새겨 아주 잘 늙었다. 아니, 단단하고 의연하게 아주 잘 익었다.

땡볕과 폭우와 거센 바람 속을 지나가는 이 생애의 시간 속에서 당신도 나도 잘 익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고구마와 호박사이 어매의 시간

바깥은 엄동이건만, 할매의 방을 여는 순간 나비들 훨훨 나는 봄날이다.

“우리 사우가 골라갖고 와서 요라고 좋게 되벽을 해 줬어.”

홀로 사는 장모님의 방을 환하고 따뜻하게 밝히고 싶었던 사위의 마음이 배인 방.

이즈음 서봉순(76·남원 금지면 방촌리 방촌마을) 할매의 룸 메이트는 고구마며 늙은호박. 윗목은 온통 고구마 차두와 늙은호박 덩이들이 차지했다.

“딸네들 오문 고구마고 호박이고 줄라고. 및 덩이는 냉겨서 동네 할매들이랑 죽 쒀묵고.”

서랍장이라도 되는 양, 쌓아올린 고구마 차두 층층마다 트매기마다 파스며 약봉투며 효자손이며 빗이며 온갖 것들이 찡겨져 있다. 무질서 속에 조화로움이 신묘한 수납 내공. 시계도 벽에 내걸린 게 아니라 고구마와 호박 사이 어디쯤에 놓여 있다.

 

 

“가찬 디다 놓고 쳐다본께 핀해.”

할매는 오늘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자다말다 시계를 들여다보기 몇 번. 이윽고 깜깜새벽부터 일어나 김장이란 거사에 돌입했다.

“이참 일요일에 우리 딸네들이 와. 그전에 간하고 숨죽여서 씻거놔야 짐장허제. 모다 묵고 살라고 애쓰고 산디 애미가 돼갖고 이거라도 히주고자와. 나 살아 있는 동안은 뭐이라도 히주고자와.”

그래서 할매는 홀로 며칠내내 분주했다.

“일년 중에 젤로 큰일이여. 봄에 꼬치 숭글 적부터 짐장 생각을 혀. 짐장 끝나야 올 한 해 갔구나 허고 마음 놓제.”

김장 생각 역시 자식 생각. 어매의 시침과 분침은 온통 자식을 향해 흐른다.

 

기다림의 깃발

“오매 그새 세 시가 넘어불었네이.”

아침에 뀌고 나간 신발을 벗지 못하고 밖에서 계속 동동거리다 이제사 안방에 들어서 시계를 쳐다본 이양심(86·보성 벌교읍 장암리 대룡마을) 할매. 오늘 벌교장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동태 한 마리를 꼭 사야만 했던 것. 와따 크다 싶은 동태 한 마리가 ‘만 완’이라고 했다.

“어야, 너머다 많이 주라 그라네, 쪼까 덜하소.”

그리 흥정의 말을 꺼냈더니 어물전 젊은각시가 얼른 말대접을 해 주었다.

“그라문 어무니, 내리간 차비는 빼드리께라” 하고 천원짜리를 내주드라고, 어매 얼굴이 시방도 흡족하시다.

“나는 약략시런 소리를 잘 못해. 싸게 도란(주라는) 소리도 못허고 더 도란 소리도 못해. 이녁이 더 쓰고 이녁이 덜 묵고 말제. 나도 장에 앙거 봤은께. 포는 사람 속을 안께.”

손 시린 수돗가에서 의식이라도 치르는 양 지성스럽고 느릿하게 이어진 동태 손질. 동태를 토막 쳐서 빠득빠득 칼칼이 깨깟하게 씻는 새, 어매의 손도 동태마냥 꽁꽁 얼었다.

“전에 밍태 시 마리를 사 갖고 와서 씻다가 놔두고 방에 잠꽌 갔다 온께 고양이가 큰 놈 한나를 갖고 가불었어. 그거이 영판 무겁기도 허꺼인디 어치게 갖고 갔으꼬.”

‘어치게 갖고 갔으꼬’의 그 맘으로 손질한 찌끄래기들도 바구리에 잘 모아 놓았다.

“와서 묵으라고.”

‘도란 공일’에 인천 사는 아들이 쌀을 가지러 온다고 했다.

요새 세상에 흔해빠진 것이 쌀.

“지그 어매도 보고 겸사겸사 오꺼이만.”

 

 

짐짓 담담한 듯 말하지만, 할매의 목소리엔 들뜸이 깃든다. 어매는 아들 앞에 놓을 밥상에 무얼 차릴지를 여러 번 고쳐 궁리하는 중이다. 요 전 장날에는 쭈꾸미를 볶아줄까 하고 쭈꾸미를 사다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국은 잔 낄애줘야제. 내가 언제 또 채려줄지 모른께.”

‘간 맞는 국’을 차려내는 관계란 애잔하고도 질긴 것.

어매가 간짓대 빨래줄에 내건 동태는 기다림의 깃발 같은 것. 아들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꾸덕꾸덕 말라갈 것이다.

“여그는 뻘갓이라 밥상에 때가 없었제. 물때에는 지그 어매가 뻘에 엎져야 밥이 나온께.”

널배를 타고 뻘을 긁어 꼬막 차두를 묵씬하게 채워 뭍으로 끄십어내다 보니 새끼들은 어느덧 머리가 굵어져 부모 곁을 떠나고 어매는 혼자가 됐다.

“그때는 암만 깜깜새복이라도 물이 쓰문 비게에다 꽃잠을 놔두고 인나. 그랄 직에는 기운도 씨고 시상에 무선 것이 없어. 자식 앞에서는 그란 용기가 생겨나.”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