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인생이란 장중한 시간을 함께 품는다!
시계는 인생이란 장중한 시간을 함께 품는다!
  • 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
  • 승인 2018.01.2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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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시계가 있는 풍경
▲ 김복임(88) 할매의 겨울방

새복닭 울 무렵에 낳고 해뜰 무렵에 낳고

미니멀리즘이란 이런 것인가.정면에 의자 하나, 시계 하나, 측면에 옷걸이 하나, 바지걸이 하나가 전부인 방.

남원 금지면 서매리 매촌마을 김복임(88) 할매의 겨울방이다. 아궁이에 불을 넣으면 굴 속 같은 조그만 흙방은 금세 포근해진다. 사방 벽이 빈 탓에 시계 초침이 째깍째깍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고적한 방.

“요새는 아직 일곱 시가 넘어도 그냥 둔너 있어. 일어나봐야 헐 일이 없은게. 젊었을 때는 말래에 종 달린 시계가 댕댕 울문 잠절(잠결)에 그 소리를 시고 있어. 네 개 치문 안심허고 조깨 더 자. 그 잠이 꿀잠이여. 다섯 개 치문 인나. 젊을 직에는 글케 살았어.”

각시 적에는 온 집에 시계 하나가 없었다.

“그 직에는 애기를 나도 몇 시에 낳는지를 몰라. 아침이문 닭 운 소리를 들어. 낮에는 해가 어디만치 있은게 몇 시쯤 됐다 허고, 밤에는 달이 어딨는가 보고 몇 시나 됐겄다 맘적으로 짐작허제.”

그렇게 새복닭 울 무렵에 낳은 딸, 해 뜰 무렵에 낳은 아들들을 키우고 살았다. 일월성신이 시계였던 시절을 지나 핸드폰이 ‘일곱 시’ 하고 야물딱지게 시각을 알려주는 시대로 건너온 할매.

시방 할매와 함께 동거중인 것은 고구마 포대이다.

“존 놈 추래서 새끼들 부쳐주고 물짠 놈만 냉가놨어.”

어매는 그런 사람이다. 그 중 못쓸 것이 응당 내 몫인 줄 알고 살아온 한 생애. 그렇게 키운 자식들은 뿔뿔이 타관 땅으로 살 자리를 찾아 떠났고 할아버지는 스무 해 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할아버지 사진은 여름방에 있다. 겨울방엔 할매 사진이 걸려 있다. 식구들 사진도 함께 찡겨 두었다.

“면에서 불러서 찍어준 것이여. 장수허라고 장수사진이여.”

저 사진을 벽에서 내리게 되는 날이 어떤 날인 줄 할매는 안다. 그 날도 시계는 째깍째깍 가고 있을 것이다.

 

 

▲ 윤쌍심(92·고흥 남양면 월정리 왕주마을) 할매의 방

가족사 연대기 옆에 째깍째깍

촌집 안방에 걸린 시계들이란 대개 가족사진과 벗해 있기 십상이다. 한지붕 아래 애면글면 복닥복닥 살아온 가족들에게 흘러간 시간을 증거하듯.

환갑과 고희잔치, 자식들 결혼식과 대학졸업, 손자 돌잔치 등 인생의 크고작은 통과의례를 기념한 사진들이 ‘가족사박물관’을 이루는 벽. 지나온 시간과 추억들이 거기 흐른다.

장하고도 애잔한 생애의 한 굽이, 한 장면이 붙박여 있는 사진들. 이 사진들에 깃든 찰나와 영원을, 과거와 현재를 일깨우는 것은 그 옆에서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다.

가족들의 거짓 없는 연대기 옆에서 시계는 단지 ‘몇 시 몇 분’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인생이란 장중한 시간을 함께 품는다.

가족사진이 모셔진 벽은 어매들에게 성소와도 같은 곳. 알록달록한 조화가 꽂힌 꽃병이며 복조리 같은 상서로운 것들이 그 옆을 호위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지금 곁에 없는 누군가의 ‘부재’를 일깨우는 가족사진이기도 하다.

“칠남매를 낳는디 모다 이래저래 아파갖고 저세상 가불고 남매 남았어.”

자식 손주들 사진과 시계가 나란히 걸린 윤쌍심(92·고흥 남양면 월정리 왕주마을) 할매의 방.

“하래가 너모나 길어. 천장 새껄(서까래)만 쳐다보다가 테레비를 키다가 끄다가 함시롱 하래가 포도시 가. 각시 때는 사방팔방 일하러 댕기느라고 오줌 눌 새가 없었어. 새끼들 믹일라고 품팔러 댕기고 쟁기질하고 밭매고 갯바닥에 동지섣달에도 가고 정월에도 가고. 그때는 춘지도 어짠지도 몰라.”

이제는 대문 밖이 천리만리인 할매에게 하루는 길고, 시계는 멈춰선 듯 느리기만 하다.

“꼬막 나배기 반지락 낙지 꿀…. 여그 뻘에서 안 난 것이 없었어. 내가 장을 및 장이나 볼븐지(밟은지) 몰라. 갯것 해서이고 조성장 벌교장 고흥장 과역장 요 근방 장은 다 댕갰어. 여그서 벌교장까지 갈라문 50리여. 새복 두 시나 되아서 걸어서 나가. 동네사람 다 모태갖고 함께 가제. 무선께. 그때는 질이나 좋가니, 동강(면)을 나가문 그때사 신작로가 나와. 그때는 함지나 있가니 바구리에 이고 가문 얼굴에 갯물이 찍찍 흐름시롱 가는 거여.”

밭으로 갯바닥으로 장으로 향한 그 걸음걸음으로 키워낸 자식과 손주들. 먼저 간 자식의 손주 여섯도 할매가 키웠다.

“긍께 나는 만날 자식 손지들 사진 쳐다보고 사는 것이 십관(습관)이여.”

눈길로라도 그리 유정하게 어루만지는 것으로 할매의 하루가 간다.

 

 

▲ 나주 왕곡면 송죽리 박승천(83)·장인숙(81) 어르신댁

시간 속에도 빛 바래지 않는 말씀

집안에 많은 물건을 두었다 해도 365일 날마다 시시때때로 눈길 닿는 지점은 시계가 걸린 자리.

하여 시계 언저리에는 꼭 그리 살아야 한다는 인생의 가르침도 함께 걸리기 마련이다.

나주 왕곡면 송죽리 박승천(83)·장인숙(81) 어르신댁. 높이 걸린 다섯 글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보다 중한 가르침은 뒤안에 차고차곡 쟁여둔 장작에 있었다. 이 장작을 쌓도록 어깨 위로 도끼를 들어올리기를 수백 번을 하였을 것이다.

‘해서 다르고 아니 해서 다르다’는 것을 아는 이가 이룬 시간의 축적. 오로지 발태죽 위에 발태죽을 올리는 몸공이라야 쌓을 수 있는 장작탑이 시계 아래 빛나는 말씀이었다.

곡성 고달면 수월리 남자들한테 방아동은 욕심을 누르는 것을 배우는 곳이었다.

“우리가 나무하러 댕긴 디가 방아동이여. 먼 디서도 나무를 하러 와. 옛날에는 산이 모다 벌거숭이였제. 남원에 송정면 세전리라고 있어. 거그는 나무 헐 디가 없응께 여그까지 오는 거여. 땔감나무가 없응께 풀이라도 비어갖고 가. 근디 집에까지 갈라문 거리가 먼께 심들어. 그런께 풀짐을 뭉꺼서 지게를 짊어질 적에 몬자 양쪽 귀를 잡고 일어나 봐. 양쪽 귀를 잡고 일어날 수 있어야만 집에를 간다 그 말이여. 무게를 미리 요량한 것이제.”

고향에 다니러 온 김종복씨가 꺼내놓은 어릴 적 이야기. 수월리 고샅에 떠도는 어른들의 말씀은 한결같았다.

“욕심 부리들 말고 살어라.”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정끝별, ‘밥이 쓰다’ 중)

돈을 쓰기 위해 별루무 것을 다 쓰고, ‘별루무 짓’을 다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리하지 말라고, 죽비를 내리치듯 먹글씨로 써내려간 액자를 거셨나 보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모두 잃는 것이다>

곡성 고달면 수월리, 어느 집 방문을 열고 만난 시계는 그리 중한 말씀 곁에 자리해 있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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