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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성이냐, 철학성이냐” 그럼에도 설레다

<걸작 열전> 드니 빌뇌브의 음모 ‘블레이드 러너 2049’ 최규재 기자lvisconti00@weeklyseoul.netl승인2018.01.2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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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벤다이어그램이 있다. 한쪽에는 흔히 감상이나 평론의 축에 들지 않는 산업(대개 작품 외적인 제작)으로서의 영화 담론이, 다른 한쪽에는 감상과 평론을 축으로 하는 ‘감독의 영화’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제작사와 감독은 서로 조율을 통해 일정 부분 교집합을 이룬다. 수익이 교집합에 해당하겠다. 이례적으로, 거의 합집합에 가까운 하나의 벤다이어그램으로 귀결되는 영화가 나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익 쪽이 아니다. ‘망했지만 거품은 없어요.’ 제작사는 감독에게 모든 힘을 몰아줬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이하 ‘2049’)이다.

추측이 맞다면 이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제작까지, 엄청난 물량과 제작비를 들여가면서까지 상업적인 측면 이를테면 흥행과는 무관하게 제작자와 감독의 세계관을 작품에 그대로 투영한 듯하다. 그것은 드니 빌뇌브가 연출을, 리들리 스콧(전작 ‘블레이드 러너 2019’ 연출)이 제작을 맡았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덕분에 ‘2049’는 ‘2019’(1982년작)와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걸작’ 반열에 오를 기세다. 영화는 ‘하이퍼리얼’(파생실재)과 ‘싱크’(동기화) 등 다소 생소한 개념을 통해 전작의 사유를 계승하며 형식미의 확대와 완성도에 주력했다. 관객이 스토리에 치중하는 동안 감독은 당대의 장르영화 간 동기화, 장르영화와 예술영화와의 동기화에 골몰한다.
 

이식 아닌 화학적 접목

이 영화를 단순한 SF액션오락영화로 여기고 극장으로 향했다면, 낭패를 봤을 관객이 많을 성싶다. 더구나 액션영화라는 광고를 믿고 온 관객들에게는 점프컷은 고사하고 롱테이크로 일관된 카메라워크가 절망감을 안겼고, 전편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보지 않은 이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전작보다 내용이 더 복잡해지고 미장센의 심도가 깊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주인공의 긴 여정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무슨 영문인지 주인공은 늘 사색에 잠겨 있고, 감독 특유의 관조적 시선으로 스토리 전개는 고요하리만치 느리다. 거기에다 러닝타임은 180분에 달하니, 사건의 실마리가 하나하나 풀릴 때면 탄성을 질러야 할 객석에선 하품소리만 들린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 국내외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많은 우려가 있었다. ‘흥행도 흥행이지만, 과연 전작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평가는 이르다. 그래도 답습 식의 ‘숟가락 얹기’는 아니었다. 전작의 철학적 성찰을 계승하면서 성찰의 저변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예수의 죽음 직후 피 묻은 그의 얼굴에 덥힌 헝겊 조각을 신학에선 ‘아이콘’이라 불렀다. 피로 복제된 예수의 형상, 그것이 아이콘의 어원이다. 아이콘은 오프라인 복제의 산물이지만 세상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아이콘은 이제 디지털화 되었고, 컴퓨터 모니터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다. 아이콘과 아이콘이 싱크(동기화) 하면서 업그레이드 되면, 또 다른 하나의 아이콘이 ‘생성’된다.

영화에서 이 생성의 아이콘은 장 보드리야르의 핵심개념 중 하나인 ‘하이퍼리얼’(파생실재- 원본이 없고 현실보다 더 리얼하다. 이는 현실의 실재를 대체하고 지배한다. 예를 들면 북극곰이 코카콜라를 먹는 광고에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다)과 만난다. 파생실재(주인공 조이)가 인간과 동기화 하면서 합쳐지는 장면은 이 영화가 보여준 미래사회 최첨단의 한 모범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드니 빌뇌브의 다른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감독의 계략이자 영화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이제 우리는 영화 내용이 아닌 영화 자체 만듦새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감독은 ‘동기화’를 통해 영화 형식미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인다. 영화사(史)의 장르영화에서부터 예술영화가 지니고 있던 특유의 아우라들을 복제, 이 모든 것들을 동기화 과정을 통해 리들리 스콧도 이룩하지 못한 영화적 성과를 내놓겠다는 야심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전작 ‘2019’만 하더라도 하드보일드 장르를 SF에 이식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2049’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류의 예술영화 거장들의 성과(스토리텔링과 카메라워크)도 겹겹이 동기화 돼있다. 이들 거장들의 심미적 토양이 서부극과 하드보일드, 멜로물, 성애물, 가족물에까지 화학적으로 접목되면서 기괴할 것만 같았던 이 혼종 SF는 한편의 대서사시로 탄생한다.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상 어차피 영화는 파생실재이다.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문학과 같은 시간예술에 해당하기에 파생실재의 동기화를 시간 순으로 녹여내는 게 관건이었다. 어쨌거나 동기화는 성공했다. 훗날 영화사에서 파생실재 형식을 통해 장르 간 동기화를 최초로 시도한 감독으로 기록될지도.
 

너희는 기적을 보지 못했어!

장르 간 동기화는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세련미를 잃을 경우 내용과 형식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기꺼이 스스로 그 함정에 빠져준다. 존재론이라는 철학적 한계와 속성상 이번 작품이 전작의 담론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애초에 인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철학적 담론의 ‘생성’을 과감히 포기한다. 전작이 주로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면, ‘2049’는 앙드레 바쟁과 누벨바그 세대들이 던진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시 대답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작보다는 스토리를 좀 더 배배 꼬고(주인공은 항상 비밀적 존재여야 한다는 문학성), 의도적으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들과 내용들’을 출현시킨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서도 예를 들자면 주인공 케이와 조이와의 드라이브에서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페이 더너웨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장면이 오버랩 된다. 하지만 그것은 파생실재가 동기화된 따름이기에 논리적으로라면 실재하지 않았던 사건들이다. 그러니까 ‘2049’의 형식과 내용들은 영화사에 실재했던 구성들보다 업그레이드 된, 상위에 해당하는 것들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당연히 쿠엔틴 타란티노 등이 시도해온 ‘대범한 오마주’는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스토리는 전작보다 조금 복잡하지만 얼개는 흡사하다. ‘좀 설칠만한’ 몇 안 남은 복제인간 리플리컨트(살상용, 노동 대체용)를 제거하기 위해 주인공 블레이드 러너(k)가 나선다. 전작과 다른 점은 케이가 인간이 아닌 리플리컨트 즉 복제인간이라는 것. 동족 사냥에 나서면서 케이는 어쩌면 자신이 복제인간이 아닌 인간의 자궁에서 태어난 ‘반 인간’일 수 있다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고뇌한다. 자신이 제거한 리클리컨트의 “넌 기적을 본 적 없지”라는 발언에 케이의 고뇌는 깊어져만 간다. 그 기적이란 이 영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핵심 키워드이며,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과 흡사한’ 변종을 일컫는다. 인간과 복제인간(넓은 의미에서 파생실재) 사이에서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났고, 여기서 파생실재와 동기화의 과정이 영화의 형식미와 일치하게 된다. 드니 빌뇌브는 “너희는 내가 그동안의 영화들과 나의 영화를 접목시키며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이런 기적을 본 적 있어”라고 질문을 던지려 했을지 모른다. 

이 영화는 영화 내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전작의 철학적 쟁점에서 더 이상 나아갈 의지는 없다. 이제 다시 영화라는 형식 앞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와 영화 간 동기화는 가능한가’라는 영화적 쟁점에 서게 된다. 철학성이냐, 영화성이냐, 그 둘 중 무엇이 중요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두 질문 앞에서 절반의 성취감과 절반의 패배감의 기로에 서있지만, 그럼에도 장담컨대 설렐 수밖에 없다. 절반의 확률에 모든 것을 내어놓은 얼치기의 심정이라기 보단, 이 도박은 져도 좋을 매혹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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