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그 학교는 어디로 간 것일까
1987년의 그 학교는 어디로 간 것일까
  • 김혜영 기자
  • 승인 2018.01.3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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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익산에 가다-1편> 김혜영

오랜만에 전북 익산에 사는 친구로부터 초대장이 왔다. 익산에 볼거리는 없지만,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며 지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고마운 초대였다. 필자는 부모님을 포함한 온 친척이 서울출신이라, 서울 외의 지역은 여행으로 경험한 것이 전부다. 여행은 순전히 관광객의 입장에서 일부를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의 집에 머물면서 생활하는 것은 더 깊고 넓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런 의미에서 익산은 어떤 경험의 장이 될 것인지를 기대하며, 가볍게 짐을 챙견 나섰다.

 

▲ 원광대 모습

 

익산은 정말 예쁜 풍경이나 그럴듯한 관광지가 없었다. 초라한 시내와 황량한 논이 전부고, 겨울이라 꽃이나 나무를 볼 것도 없었다. 텅 빈 도로와 낮은 건물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서울은 어떻게든 건물을 더 높게 세우려고 야단인데, 익산은 그러한 흐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했다. 애써 실망한 기색을 감추고, 친구와 함께 익산의 번화가에 있는 원광대학교로 향했다. 여느 대학로가 그렇듯, 밥을 먹고, 카페까지 가고 나면 할 것이 없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심심한 동네에서 살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친구와 느긋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원광대학교를 산책하기로 했다. 친구는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원광대학교의 축제를 즐겼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학교 곳곳을 설명해주었다. 동네 주민이라면 누구나 학교의 건물 위치 정도는 꿰고 있는 듯 했다.

학교의 첫 인상은 정문의 풍경이었다. 큰 가로수가 줄지어 서서 학생들을 반기는데, 긴 정문의 입구를 통과하면 학교의 상징이 담긴 조각상이 보였다. 꿈꾸던 캠퍼스의 모습 그 자체였다. 고등학생 때 현장학습으로 자주 방문했던 서울대학교도 그랬고, 전주 여행 중 들린 전북대학교도 그랬다. 학교 마크가 있는 정문을 통과하면 늘 제일 먼저 나무들이 보였고, 캠퍼스는 푸른 잔디로 뒤덮여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현재 재학 중인 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으로 본 것은 공사판이었다. 높이 솟은 철제 패널 사이로 흙먼지가 나뒹굴고, 공사를 반대한다는 현수막과 붉은 글씨들이 이곳저곳에 널려있었다. 정문의 가로수 길이나 낭만이 가득한 캠퍼스는 없었다. 선배들은 정문으로 등교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기타를 치고 술을 마시던 잔디밭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느낀 것은 꿈꾸던 대학과의 괴리와 상실감이었다. 무언가를 상실한 이상한 공간 한 가운데에 던져진 것 같았다. 사실 공사 이전에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서, 필자가 무엇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공간이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느낌이었다. 송도 캠퍼스에서 1년을 보내고 다시 신촌 캠퍼스로 올라왔을 때, 공사는 이미 끝나 있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돈된 느낌이었고, 촌스럽거나 지저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단장을 마친 새 캠퍼스를 봐도 전혀 유쾌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대학이라기보다는, 꼭 어떤 기업의 연구 시설에 방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흙과 나무가 자리했던 백양로는 새하얀 보도블록과 에스컬레이터로 바뀌었고, 한참을 들어가야 언더우드 동상이 있는 옛 캠퍼스가 나타났다. 문과대학, 사회과학대학 등의 오래된 건물 사이에는 새로 지은 신경영관이 있고, 말 그대로 캠퍼스가 분리된 것 같았다. 새 건물과 옛 건물들로.

필자는 동기들과 새로운 캠퍼스를 거닐며, 건물만 봐도 어떤 대학인지 알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경영관은 건물 내에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차고 넘칠 정도로 있어서, 누가 봐도 새로 지은 강남스타일의 건물이었다. 문과대학과 교육대학은 가파른 언덕에서 위태로운 건물을 지탱하고 있고, 신과대학은 캠퍼스 구석에서 홀로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공대는 캠퍼스의 4분의 1정도를 차지하는데, 여러 건물이 구름다리를 통해 이어져서 거대한 테마파크를 보는 것 같았다. 분명 다양한 교육과 경험의 장이 열려있는 종합대학에 왔는데, 제각기 분리된 대학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 원광대 모습

 

그러나 익산에서 만난 원광대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건물을 봐도 어떤 대학인지 몰라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안내판을 봐야 어떤 건물인지를 알 수 있었다. 건물의 구조도 이상하고 복잡했고, 쓸데없이 넓은 캠퍼스 내에 불규칙적으로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촌스럽고, 비효율적인 캠퍼스였지만, 그 안에 분명한 생동감이 있었다. 오래된 조각상이나 불편한 나무 의자들이 학교 곳곳에 있고, 학생들은 그 부모님 세대가 썼을법한 공간과 물건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학교의 역사와 학생들의 추억이 그대로 묻어났다. 적어도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어떤 세월을 지나왔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필자가 다니는 학교에서 느낀 상실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캠퍼스를 재창조한다는 공사를 하면서, 이전의 학교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요즘 이슈가 된 영화 ‘1987’을 보면, 학교의 신촌 캠퍼스가 계속 등장한다. 특히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 전경들이 정문 밖에서 최루탄을 던지는 장면이 중요하게 나온다. 카메라는 학교 안에서 학교 밖의 폭력을 바라보는 각도로 비추는데, 학생들이 하교할 때 늘 볼 수밖에 없는 관점의 장면이다. 재학생인 필자는 마치 익숙한 풍경에서 시간을 돌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타임슬립 기법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촌 기차역이나 횡단보도 같은 바깥 풍경은 그대로인데, 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이 너무 달랐다. 아니, 학생들과 전경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고, 바뀐 정문의 모습에서 너무나도 괴리감이 느껴졌다. 2018년의 나는 이한열 열사가 다녔던 그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정말 그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선배들이 피를 흘리고 목청을 높였던 학교는 영화 속 그래픽으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몇 년 전,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꼈던 세월호의 기억 교실이 떠올랐다. 유족과 시민단체는 세월호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학교 측은 남은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실을 이전시켰다.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를 차치하고, 남은 사람들을 위하는 방식도 그렇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인재(人災)로 인한 참사는 그대로 공간을 보존해야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또 다른 참사를 방지할 수 있다. 공간에 작용하는 기억의 정치인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창경궁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탈바꿈시켰던 사건을 기억하고, 분노한다. 보존되어야 하는 중요한 공간을 멋대로 바꿔 의미와 역사를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손으로 그러한 공간을 없애는 일에는 관대한 처사를 보인다. 현재가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일 테다. 많은 것을 잃은 지금은 정말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잃지 말아야하는지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연세대 모습

 

긴 산책을 마치고, 친구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딘가 촌스러운 원광대가 계속 기억에 남았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학교 캠퍼스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언더우드 동상이나, 문과대학 지하의 곰팡이 냄새에 오히려 정이 들었다. 훗날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캠퍼스를 찾아왔을 때, 내가 기억하는 것과 앞으로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선거 공고 포스터와 대자보들이 지저분하게 붙은 학생회관, 밤잠을 설치며 글을 썼던 편집실의 먼지 냄새, 바로 옆에 이한열 열사가 몸담았던 만화사랑 동아리 방을 지나갈 때마다 느꼈던 이상한 기분. 나는 그런 것들로 학교를 기억하고 싶고, 다른 이에게도 수없이 소중한 공간들이 그렇게 기억됐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가니까.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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