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강진수의 ‘서울, 이상을 읽다'-마지막회

▲ 시인 이상

누군가 태어나자마자 죽어간다면 우리는 그 누구를 어떻게 대할까. 지긋지긋한 병마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몸으로 드러나는 통증과 괴로움이 아닌, 오직 몸속에서만 빚어지는 고통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의 아픔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도와줄 수가 있을까. 신기한 것은 예술을 하는 누군가거나 시를 쓰는 누군가, 영화를 만드는 누군가, 또 그 외에도 자신의 길을 애써 찾아 걷고자 하는 누군가를 바라보면 일맥상통하게 이름 모를 병마와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병과 이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다. 결국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는 길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면, 죽어가는 흐름을 맞받아 역류하는 삶의 은총을 향유하는 사람들 역시 있기 마련이다. 후자에서는 삶의 역동성이 흘러넘치는 것에 반해, 전자는 치열한 다툼 속에서 절망만이 맴돈다. 우리의 시인은 이토록 난해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이다.

시인 이상을 다루면서 가장 뼈에 와 닿게 느꼈던 것은 그 지긋지긋한 삶과 병마다. 이상이 실제로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알 수 없는 불치병으로 가득 들어찬 것만 같다. 암 덩어리 같은 정체불명의 생각들이 그의 머리에 자리 잡는다. 뻗어나간다. 글로써, 시로써, 소설로써, 수많은 실험들과 고민의 흔적들로써, 장난으로써, 농담으로써, 푸념으로써, 발작으로써. 적어도 그의 삶이 끊어내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시인은 너무나도 겁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삶을 끊어낼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줄곧 시를 썼는지도 모른다. 시를 쓰는 것이 대단히도 지겨운 일이었음에도 그는 꾸역꾸역 시를 써내려갔다. 그 절반은 흔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암호다. 그렇다고 암호를 풀어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의 시를 풀어내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그의 세계에 갇혀버린다. 그의 병이 옮고 만다. 그저 눈으로만 보라, 멀찍이 떨어져 서서. 이상, 김해경, 그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곁에 가까이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심지어 사랑하는 누군가도, 사랑하는 누군가들도, 수없이 많은 사랑이 남발하는 그와 그의 누군가에게도.

 

 

그의 시를 읽고 나면,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사랑도 그렇다. 질투도 그렇다. 아픔과 슬픔도 그렇다. 비루함과 비겁함도 그렇다. 희열과 쾌락도 그렇다. 외로움도 그렇다. 초조함과 불안함도 그렇다. 격정과 분노도 그렇다. 이상이라는 한 인간도 그렇고, 김해경이라는 한 남자도 그렇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감정들이며 하나의 형상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 모두가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린 시 속에서 어떤 건더기를 찾아내고자 한다. 단단한 건더기. 우리는 아주 단단한 것을 바란다. 단단하게 뭉쳐져 있고 그래서 결코 풀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건더기. 그러나 애초에 이상이라는 시인에게는 단단한 무언가는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형체 없는 액체처럼, 혹은 기체처럼 아예 볼 수도 없게, 흘러내리거나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시를 쓰기 한참 전부터 이상은 그 모든 것을 계획했을 것이다. 철저히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생각이 맞부딪히면서 소리 내는 모든 현상을 그는 나름의 기록법으로 꼼꼼히 적어나갔을 것이다. 정신 나간 사람의 말소리처럼 시가 읽힌다면 이는 가장 제대로 읽은 것임이 틀림없다. 이상은 분명 그것을 바랐을 테고 그것을 기대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끈적끈적하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의 시로부터 우리는 극한의 추위를 느낀다. 부유하는 그의 시를 손끝으로 만져봤을 때, 저릿하게 전해져 오는 차가움. 이상이라는 인물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뜨겁게 토해내는 시인인 듯 보이지만, 천만에, 그는 우리가 다룬 그 어떤 시인보다도 냉철하고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김수영과 비교해보라. 김수영이 시를 쓰며 무엇이라고 했던가. 기침을 하자, 가래를 뱉자고 말했다. 그것은 뜨거운 목구멍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시인 이상은 뜨거운 목구멍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시대와 사회, 세계라는 단어들을 두려워했던 시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겁 뒤로 숨었고 그의 시 역시 모든 그림자 뒤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예 그의 세계 자체가 다른 이들의 세계, 사회라는 이름으로 갈음되는, 의 뒤로 숨어드는 것이다. 병을 두려워하는 전형적인 환자가 그였고, 그는 병을 겪으면서도 결코 자신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늘 그는 자신의 불행을 자초했으며 자기 자신 안에서 수많은 분열을 겪고야 말았던 것이다.

기형도, 백석, 김수영을 거쳐 마지막으로 이상을 연재한 것은 이러한 의도였다. 기형도의 순진무구함과 백석의 노련함, 김수영의 권태로움에 이어 우리가 읽어온 모든 시를 다시 원상복구 시켜 줄만한 인물로는 이상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시는 그동안의 시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깨부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시가 잘못되었기에 그에 대한 심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박살내고 깨부수는 것에만 집중하고, 그것에 우리는 시라는 이름을 가볍게 얹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순간 우리 역시도 시가 되어버린다. 시와 사람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 우리는 어렴풋이 시인 이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제 시답게 살아온 시인. 그 어떤 시와 소설보다도 찌질하고, 비열하며, 비겁하고, 외롭고, 슬프고, 안타까운 삶을 살아온 시인이 자신의 시마저도 깨부수며, 그 모든 감정들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던 궁극의 초인처럼, 그러나 결코 선망 받지 못하는 광대의 놀음처럼, 그의 짧은 생애는 비참할 것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우리는 이상을 더욱 기억해야 한다. 그가 병실 침대에 누워 마지막으로 뱉었던 말을 되뇌어 보자. 멜론이 먹고 싶소.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멜론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랬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중요한 것은 그가 할 법한 마지막 말 한마디였다는 것이다. 누군가 지어낸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이상이라는 시인은 이미 멜론을 애타게 찾으며 죽음을 맞이한 누구로 기억되고 말았다. 기억이라는 것은 그처럼 비열하고 치사한 것이다. 이상이 그렇게도 쳐부수고 깨뜨리고 싶어 했던 기억은 되살아나 그의 죽음을 하나의 프레임에 가둔다. 시인 이상은 모순의 결정체다. 거대한 모순의 쳇바퀴가 그의 삶과 죽음이라는 곡선 가운데를 굴러다닌다. 우리는 세월이 흘러가고 시대가 변해가면서 더욱 시인 이상을 찾을 것이다. 더욱 기억에 남기려고 하고 더욱 그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이상의 쳇바퀴를 굴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가 깨뜨리고 부숴놓은 것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향해 선망의 눈길을 보낸다. 광대가 살아있을 때는 처절히 죽여 놓고선, 쳇바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다. 기억은 세대를 거쳐 가면서 병에 들었다. 이상이 놓아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멜론이 먹고 싶소. 멜론….

오래된 시인들을 들춰 본다는 것은 이처럼 위험한 일이다. 이젠 생생하고 싱그러운 시대의 시들을 읽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곡소리를 할까 들어보자. 역사는 끝났고 교과서는 덮어놓을 시간. 우리가 그동안 들여다본 네 명의 시인들 모두에게 큰 소리로 안녕, 인사하면서. 우리는 살아있는 시대의 죽어가는 시들을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자.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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