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시계가 있는 풍경

어머니는 언제 시계를 볼까

시계는 정해진 약속이 있을 때 가장 존재의 의미를 갖는 물건이다. 약속시간이 임박해 오면 거듭 시계를 확인하게 된다. 어머니는 언제 시계를 볼까.

어머니는 식구 중에 가장 약속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실 식구 중에서 가장 약속이 많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삼시세끼’라는 지엄한 약속을 평생 지켜내온 사람이다. 일찍이 시계가 없던 시절에도 집집이 마당에는 어머니의 앙부일구(仰釜日晷)가 있었다. 감나무 가지 그림자가 얼마나 긴지, 담벼락의 어디만큼 그림자가 내려왔는지, 장독 그림자가 어느 쪽을 향하는지만 보고도 어머니는 밥때를 어기지 않았다.

‘내 식구의 밥때’라는 약속이 사라진 방에서 어머니는 언제 시계를 볼까.

 

▲ 정순례(79·순창 적성면 지북리 태자마을) 할매

어제는 청춘 오늘은 백발

“우리 영감이 저 옆방에서 주무셨거든. 시방도 거기 계신 것만 같애.”

그래서 무담시 문을 열어보곤 한다는 정순례(79·순창 적성면 지북리 태자마을) 할매. 스물한 살에 시집와서 60년을 함께 산 남편은 지난해 12월 세상을 떴다.

“지난 공일에 딸들이 와서 같이 짐장했어. 짐장짐치 보시기에 담아서 밥상에 올려놓고 난께 영감 생각이 나. 요 맛난 짐치를 인자 같이 못 묵은께.”

시계 옆에 나란히 걸린 사진엔 할매가 각시였을 적 모습이 담겨 있다.

“시간은 쏜 살같이 가고 세월이 잠꽌이던만. 어제는 청춘인디 오늘은 백발이여. 서로 존 낯으로 살고 서로 애끼고만 살라 해도 짤룬 시상이여.”

 

▲ 조순금(78) 할매 댁

시계의 짝꿍 ‘가화만사성’

<하면 된다 인자무적과 함께/ 범선들 어디로 떠 갔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함께/ 푸시킨과 함께/ 희수 아버진 어디 가사나/ 이발소 닫아걸고 고깃밸 탔나/ 이발소 집어치우고 수리울 갔나> (윤제림, ‘읍내 이발소’ 중)

오래된 이발소의 문을 열면 만나는 풍경들. 이발소 아재의 바리깡 아래 머리를 밀던 소년들은 그리하여 물레방아 도는 고향 마을을 떠나 범선에 돛을 올리고 인자(仁者)는 무적이니 하면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렇게 이발소 액자를 종합한 말씀을 살아내고 있을 터이다.

이발소에 물레방아와 푸시킨이 있다면, 집집이 마루에 걸린 시계의 짝꿍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압도적이다.

여수 소리도 어느 댁의 시계 곁에는 ‘가화만사성’과 더불어 새로 써붙인 ‘입춘대길’이 양명하였다. 장흥 장재도에선 용맹한 호랑이와 ‘가화만사성’을 양쪽에 거느린 시계를 보았다.

“여그 섬 뺑뺑 돌아서 가상 전부가 다 반지락밭이여.”

‘진달래와 벚꽃이 필 때부터 질 때까지’ 반지락은 궁극의 맛에 달하고 갯바닥을 곁에 둔 사람들은 뻘투성이로 고생을 감내하여야 했다.

“글도 툭 터진 디서 산께 좋소. 우리는 만날 저 바다를 보고 산께 바다맹키로 속을 널룹게 열고 살아. 쫍짱하니 오믈씨고는 못 살아.”

쫍짱허니 오믈씬 그 맘에서 불화가 생겨나는 것임을 가르쳐준 김철동 할아버지의 어록이다.

영광 묘량면 장동마을 조순금(78) 할매 댁에도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는 듯 시계 곁에 ‘家和萬事成’이 걸려 있다.

“내가 젤로 몬자 달았어.”

‘젤로 몬자’라는 대목에 힘이 한껏 실린다. 시계 이야기다.

“내가 요놈을 사다가 마루 위에 딱 걸어논께 온 동네가 나를 보고 싸악 사다가 걸어놨당께.”

할매는 이 동네 라이프 스타일의 ‘트렌드세터’였던 셈.

“마당에서 일하고 텃밭에서 일할 직에 요놈 쳐다보문 일하다가도 시간을 안께 핀하제. 밥때가 지났다 허고 어서 일을 허제.”

노상 밥때가 지나서야 허리를 들어 쳐다보던 시계.

“내야 몸 한나 써서 여럿이 핀허문 좋다 그 정신이여.”

어쩌면 집집이 ‘가화만사성’은 ‘내야 몸 한나’를 헌신한 어매의 그 마음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니.

 

▲ 여수 율촌면 반월리에 사는 위선심 할매네

‘오늘도 무사히’

“나의 친구인 할머니들, 저 상 받았어요. 여러분들도 열심히 하셔서 그 자리에서 상 받으시길 바랍니다”

‘마이 디어 프렌즈’인 이 세상의 할머니들을 향한 응원의 그 말은 따뜻했고, 이 말에는 허를 찌르는 유쾌함이 있었다.

“지금 아흔 여섯이신 친정어머니와 어머니의 하나님께, 또 저 나문희의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70대 배우 나문희의 수상소감.

‘어머니의 하나님’과 ‘나의 부처님’처럼 다름이 서로 공존하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면 그것이 평화.

여수 율촌면 반월리에 사는 위선심 할매네 집에서도 서로 인연없을 성 싶은 것들이 한데 모여 이룬 조화로움의 경지를 만난다.

‘오늘도 무사히’를 기원하는 곱슬머리 소녀 액자, ‘칠전팔기((七顚八起)’ ‘입춘대길(立春大吉)’ 같은 기도와 다짐과 축원이 집대성된 자리에 피에로 모양 시계, 예전에 쓰던 호롱등잔, 씨옥수수 다발까지 가세했다.

‘오늘도 무사히’는 예전에는 버스나 택시 기사들의 좌석 앞에서도, 이발소 거울 위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던 액자. ‘오늘도 무사히’란 간절하고 간명한 기도가 갖는 공감의 힘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원본은 초상화로 유명했던 18세기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가 그렸으며 ‘어린 사무엘(The Infant Samuel)’이란 제목도 있는 작품이다.

큼지막한 벽시계 옆에 ‘오늘도 무사히’란 소망이 내걸려 있듯, 고색창연한 사자성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의미를 거드는 것은 불굴의 의지로 웃음을 잃지 않는 피에로 모양 시계이다.

들명날명 쳐다보는 마루 위에 오늘 하루치 혹은 한 생애의 소망과 다짐을 내걸었으니, 오늘 무너져도 내일은 일어서는 게 삶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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