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스톡홀름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20여분 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쿵엔스 쿠르바(Kungens Kurva)의 이케아(IKEA). 세계에서 가장 큰 이케아 매장으로 알려진 이곳은 이케아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슴푸레 해가 기우는 시간 이케아 매장의 외관이 다른 때보다 더 거대해 보인다.

영원한 이케아의 주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의 죽음이 전해진 직후여서 그럴까?

2018년 1월 27일 세계적인 가구 회사 이케아의 설립자인 잉바르 캄프라드가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3년 이케아를 처음 세웠으니 75년 간 세계 가구의 공룡, 조립식 실용가구의 산증인으로 군림했던 그가 찬란한 영광의 순간들을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 스톡홀름 쿵엔스 쿠르바 이케아 매장 1층 에스컬레이터 앞에 놓인 캄프라드 추모 공간. 사진 한 장과 추모 글을 적는 노트 한 권, 그리고 몇 송이의 꽃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잉바르 캄프라드의 조국 스웨덴은 조용하다. 사실 이케아는 스웨덴의 국격을 높인 대표적인 기업이다. 에릭손, 볼보, 사브, H&M, 스카니아 등등 스웨덴의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즐비하지만, 이케아는 소비자에 가장 접근한 품목을 다루면서 스웨덴 디자인을 세계속에 심어놓은 장본인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기업보다 스웨덴의 국격을 높인 기업으로 통한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맞으면서 스웨덴은 어떻게 이토록 차분할까? 이상하리만큼 스웨덴은 캄프라드의 죽음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캄프라드의 사망 소식이 처음 전해진 28일 이후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 다겐스 뉘히에테르 등 스웨덴의 대표적인 일간지나 SVT, TV4 등 주요 방송사의 뉴스에도 그저 ‘잉바르 캄프라드 사망’ 또는 ‘이케아 창업자 별세’ 정도의 뉴스 제목이 있을 뿐이다.

SVT가 ‘세계에 가구를 비치하고 싶었던 남자(Mannen som ville möblera världen)’라는 제목의 추모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했다. 하지만 요란하지 않았다. 심지어 SVT는 오히려 ‘캄프라드, 2개의 스캔들(Kamprad, två skandaler)’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먼저 내보냈다. 캄프라드의 사망 소식을 전한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방영을 예고하기까지 했다.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가 “스웨덴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가가 사망했다. 슬픈 일이고, 스웨덴은 그를 추모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스웨덴 왕위 계승자인 빅토리아 공주도 “이케아를 통해 스웨덴을 부유하게 만든 캄프라드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언급했다. 보수당과 중앙당 등 친기업 성향의 보수 정당들도 추모 메시지를 발표했다.

하지만 정치권이나 언론의 분위기와는 달리 스웨덴 일반 시민들은 캄프라드의 죽음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캄프라드가 사망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허다했다. 또 신문이나 방송에서 뉴스를 보기는 했지만 캄프라드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 중 이케아를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의 스캔들 탓일까?

 

▲ 스웨덴 공영 방송인 SVT의 캄프라드 추모 다큐멘터리

 

캄프라드와 관련한 2개의 대표적인 스캔들은 나치 전력과 탈세다.

캄프라드는 이케아가 설립되던 시기인 1943년 스웨덴의 대표적인 나치스트였던 페르 엥달(Per Engdahl)이 주도한 ‘새로운 스웨덴 운동(Nysvenska Rörelsen)’에 16세의 나이로 가입한다. 그는 나치 운동의 자금을 모으고, 나치당원을 모집하는 일에 앞장섰다. 1994년 그 같은 사실이 공개된 후 캄프라드는 이 사실을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엥달은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해 사과가 억지였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캄프라드는 1973년 이케아 본사를 네덜란드 델프트로 옮겼다. 스웨덴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부담하는 사회보장세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또 1990년대 초반 유럽의 대표적인 조세피난처인 리히텐슈티인에 ‘인터로고’라는 재단을 세우고 무려 17억~22억 유로(2조 2000억~2조 7700억 원)을 탈세한 사실이 드러나 비난받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스웨덴 최고의 부자, 스웨덴의 자존심과 같은 이케아의 창업자인 캄프라드의 죽음은 일부 부정적 평가와 함께 시민들의 대체적인 무관심 속에 놓였다.

직장인인 다니엘 쇠레브란트 씨는 “사업가로서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면서도 나치 전력에 대해서조차 “스웨덴 사람으로써는 안타깝고 놀랍기는 한데 개인적으로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캄프라드의 고향인 스몰란드 출신의 대기업 직원 페르 요한손 씨는 “그는 대단한 장사꾼이지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의 죽음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스웨덴 해군의 미카엘 욘손 대령은 “비록 그의 나치 전력이 공개돼 좋은 이미지를 가리긴 했지만, 그가 창조한 이케아가 스웨덴 사람들의 삶을 다른 방식을 바꿔준 것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나치 전력에 대해서도 “당시 그의 나이가 워낙 어렸고, 스웨덴은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던 것이라고 이해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미카엘 에크 씨는 “나는 잉바르 캄프라드에 대해 잘 모른다”고 전제하면서도 “하지만 직접 나사를 조이고, 조립하는 가구를 통해 스웨덴 사람들에게 일종의 성취감을 줄 수 있는 판매를 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나치 전력에 대해서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합리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비판했다.

 

▲ 쿵엔스 쿠르바 이케아 매장

 

스웨덴 현대경제포럼의 리카르드 엔리크 박사는 “캄프라드나 이케아는 결코 건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는 “캄프라드는 저가의 이케아 판매 전략을 위해 종사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지불할 뿐 아니라, 임금을 적게 주는 하청업체를 선정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캄프라드는 세계 8위의 거부이지만 그에 비해 기부나 자선에 인색하고, 이익을 남겨서 회사에 쌓아두는 것에 열중인 ‘이상한 사업가’”라고 평가절하 했다.

쿵엔스 쿠르바 이케아 매장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직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1층 에스컬레이터 앞에 캄프라드의 작은 사진 한 장과 추모 메시지를 적는 노트, 그리고 꽃 몇 송이가 담긴 바구니가 있을 뿐이었다.

꽃 한 송이를 올리고 노트에 “당신을 기억한다”는 짧은 추모 메시지를 남긴 고객 안나 페르손 씨는 “그는 스웨덴을 상징하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다. 나치에 동조한 것도, 세금을 안내기 위해 회사를 옮긴 것도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케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캄프라드와 이케아는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고 냉정한 한 마디를 남겼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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