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아버지와 살던 시절, 재미있는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도 많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음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맨 정신일 때보다 술에 취해있을 때가 더 많았던 아버지. 때문에 집엔 항상 먹을 게 부족했다. 혼자인 나는 거의 매일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생활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먹을 게 있었다는 것인데, 바로 자연이 주는 혜택이었다. 산에 가면 겨울을 빼곤 항상 어느 정도는 먹을 게 있었다. 산딸기를 따먹기도 했고, 칡뿌리를 캐먹기도 했으며, 소나무 새순을 잘라먹기도 했다. 소나무 새 순의 경우 잔뜩 잘라서 집에 가져다 쌓아두고 배고플 때마다 먹는 일도 있었다.

물론 과자 등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당직골엔 딱 하나의 가게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집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 곳이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10원짜리 캔디나 뽀빠이, 조금 잘 사는 집 아이들은 센베이 과자라고 하는 것을 즐겨 먹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두 언감생심. 난 센베이 과자가 무척 먹고 싶었는데, 결국 침만 삼키다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집 주변에 널려 있는 밭들도 나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곳이었다. 물론 우리밭은 아니었지만 배가 하도 고프다보니 때론 고구마를 몰래 캐먹기도 했고, 무를 뽑아서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항상 배는 고팠다. 꼭 쌀밥이 아니더라도 김이 모락모락나는 밥이 그토록 그리울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술 취한 아버지에게 마구 울며 떼를 쓰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이웃집에 가셨다. 그리고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나는 괜찮으니 우리 아들 밥 한공기만 먹게 해달라"고 공손히 부탁을 하셨다.

그러면 그 아주머니는 나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보리쌀이 대부분인 밥을 한공기 가득 퍼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반찬은 대부분 김치 뿐이었다. 그 집도 우리집 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배가 고파 울 때마다 그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럴 때마다 친절하신 그 아주머니는 내게 밥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자꾸 그런 날이 겹치다보니 나중엔 어린 내가 무안할 정도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셨는지 그 아주머니는 자기의 어린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난 배가 참을 수 없을만큼 고플 때마다 매일 그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나에게 아주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날씨가 무척 더운 여름이었다. 난 그 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정확히 내가 아홉 살 때 일이었다.

그 날도 집에 양식이 없어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다가 도저히 안되겠길래 집앞 울타리에 묵직하게 열려 있는 호박 한덩이를 따서 칼로 잘게 자른 뒤 아버지와 함께 볶고 있던 참이었다. 밖에서 동네 어린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누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울타리 싸립문 밖에 두 명의 어른과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춰선 채 그 세사람을 보고 있었다. 세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난 아버지와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 때 아버지의 눈빛이란…. 내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그런 표정이었다.

난 그들이 누구인지, 왜 아버지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그런 눈빛과 표정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두 명의 어른 중 여인은 나의 어머니였고, 남자는 나의 외삼촌이었던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는 내 여동생이었다.

사실 아버지와 살면서 난 엄마의 존재에 대해 여러차례 생각을 해보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헤어져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었지만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를 보면서 "왜, 나에겐 다른 아이들처럼 저런 어머니가 없을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언젠가 한 번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가 호되게 맞은 뒤로는 그저 머릿속으로만 생각을 했을 뿐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다니, 그리고 그 어머니가 내 앞에 나타나셨다니….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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