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궁도대회

▲ 장사정 과녁

 

문자가 왔다.
 

고창군 궁도연합회 회장 이 취임식 기념 궁도대회가 열립니다. 장소는 상하면에 새로 문을 연 장사정.

단체전과 개인전을 교차 진행하는데 1등 상금이 십만 원이요, 2등 상금이 칠만 원, 3등은 오만 원이나 걸려 있습니다. 개시는 오전 9시.

우리 활터 초파정과 회원 여러분들의 명예와 부를 쟁취하기 위해 열심히 습사를 합시다. 초파정 사두 표명섭 올립니다.
 

1등 상금 십 만원에 명예와 부가 걸려 있다는 표현이 웃겨서 한참을 피식피식 웃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문자가 사흘 뒤에 한 번 더 왔다. 확인 차원에서 두 번 보낸 것이려니 했는데 행사 전날에도 왔고, 당일 아침에도 왔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안 나오는 사람이 많아버리면 어쩌나 하는 신임 사두의 이른바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읽혀진다.

그래, 가야지. 가서 오랜만에 떠들썩한 소리도 좀 듣고, 소주도 한 잔 해야지. 손꼽아 그날을 기다린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날이 왔다. 그런데 이게 뭐냐. 자동차가 얼어버렸다. 문짝이 안 열린다. 떼어내느라 혼났다.

문짝만 얼어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시동을 걸면 금방 꺼져 버린다. 날씨가 추우면 배터리가 방전될 수 있다는 얘기가 생각나기는 했다. 하지만 배터리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일단 시동은 걸린다. 걸렸다가 금방 꺼져 버린다.

키를 돌리면 부릉부릉 하다가 뚝, 죽어버리고, 다시 돌리면 다시 부릉부릉하다가 또 죽어버린다. 그 바람에 아마 한 십여 분 정도 실랑이를 벌였을 것이다. 이놈의 것이 왜 이러냐, 왜 이러냐, 중얼중얼 미친 듯이 혼잣말을 해가며 시동을 걸고, 또 걸기를 되풀이하다가 아차 그렇구나, 싶은 순간이 왔다. 연료가 경유도 아니고 휘발유도 아닌 가스인 것이다.

가스 차는 쉽게 얼어버린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 일단 얼었다 하면 복잡해진다. 뜨거운 물을 가져다가 마구 퍼부어댈까, 하다가 결국은 포기했다. 손이 시리다. 발도 시리다. 온 몸이 덜덜 떨린다. 아홉 시까지 모여서 함께 가기로 했는데 아홉 시는 이미 넘어 버렸다. 약간의 고민을 거친 뒤에 전화기를 꺼냈다.

 

▲ 새 집을 지은 장사정

 

“아이고 사두님, 나는 암만해도 못 갈 것 같소야.”

“아니 으째서요?”

“차가 걍 꽝꽝 얼어부렀당게요.”

“워매 그래요 잉? 쫌만 기다리시오 야, 내가 후딱 달려갈 것인게 잉.”

마음은 벌써 포기하고 있었거늘, 몸소 차를 몰고 달려와 준다고 하니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스럽기도 하고 복잡하다. 그래도 어쨌든 고마운 마음이 커서, 단 일 미터라도 덜 수고스럽게 마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만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이런 날 뭐가 제대로 될까요?”

만나자마자 인사는 뒤로 하고 걱정부터 나누기 시작했다.

“그렁게 말이요. 그래도 어째요. 날을 오늘로 잡아놓은 것을.”

걱정은 컸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활터 행사에서 예외가 있어본 적은 없었다. 일단 날짜가 정해지면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대로 강행한다. 우천시 행사를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경우도 당연히 있어본 적이 없었다. 비가 내리면 빗속에서 시위를 당기고, 눈이 내리면 눈 속에서 두 눈 부릅뜨고 과녁을 응시하는 것, 그것이 궁사의 자세이고, 궁사의 마음가짐이다.

그렇다 해도 걱정은 걱정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고창의 겨울은 바람이 많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상하면은 바다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고, 장사정은 맨 땅을 굴삭기로 파고 밀어서 과녁을 세우고, 풍향기를 꽂고, 방풍림을 조성해서 개정한 지 3년도 채 안 된 까닭에 찬바람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야만 한다.

그렇다. 장사정은 이제 막 이삿짐을 푼 새 집이다. 역사도 십 년 남짓밖에 안 된다. 시작은 구시포 해수욕장이었다. 활을 만지고 싶지만 멀리까지 갈만한 시간여유가 없는 몇몇 사람들이 해수욕장 뒤편 숲속에 풍향기와 과녁을 세워놓고 이름을 장사정이라고 붙였다. 물론 그 땅은 주인이 따로 있는 사유지였다. 해수욕장 앞에 항구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땅은 수요가 높아졌고, 장사정은 풍향기와 과녁을 빼 들고 유리걸식을 해야만 했다.

 

▲ 아직은 덜 춥다.

 

처음에는 해리의 초파정과 상하의 장사정이 화학적 결합을 하면 되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단 세운 깃발을 내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창군 궁도연합회까지 이미 창설돼서 활동 중이었다. 장사정이 깃발을 내린다면 고창에 활터가 모양정과 초파정 그렇게 두 개로 줄어들고, 그러면 굳이 연합회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어진다.

연합회는 외부인 시선으로 보자면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구성원 각자에게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도 단위는 물론이고, 전국 단위의 궁도대회에 고창군 대표로 내보낼 선수를 선발하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고무 찬양하는 임무 또한 연합회가 안고 있다. 혼자서 외롭게 연습을 하는 것보다는, 연합회 차원의 격려와 고무찬양을 받아가면서 훈련을 한다면 뭔가 좀 사명감 같은 것도 생기지 않겠는가 말이다.

오늘은 바로 그 연합회를 2년 동안 이끌어 나갈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임원진들이 앞으로 잘하겠다고 선서를 하는 날이다. 그리고 부대행사로 궁도대회가 열린다. 부대행사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진짜일 수도 있다.

개인전 1등 일등 상금 일백 만원도 아니고 달랑 일십 만원을 과연 누가 먹을 것이냐, 하는 문제도 당연히 중요한 관심사항이지만, 고창군 대표선수 선발 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각자의 역량을 가늠할 만한 바로미터가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연합회 차원의 궁도대회이기 때문에, 누가 회장인가의 문제보다는 활쏘기 자체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 손가락이 얼었어요.

 

그런데 춥다. 너무 춥다. 게다가 그리 두껍지도 않은 궁도복장 차림이고 보니 칼바람이 그냥 살을 파고든다. 그래도 명색이 궁사들인데 춥다고 뭔가를 마구 껴입고 사대에 설 수는 없다. 연합회 차원의 궁도대회는 궁도복장을 갖춰야 한다는 원칙 때문만은 아니다. 일단 방한 점퍼 같은 것을 입고서는 시위를 당기기가 어렵다. 두꺼운 양말이나 두꺼운 바지도 궁사에게 적합한 복장은 아니다.

비정비팔(非丁非八)이라 했으니, 사대에 섰을 때 두 발의 모양이 정(丁)자도 아니고 팔(八)자도 아닌, 살짝 어슷하게 삐딱한 팔자 모양이 되게 서서 힘을 잔뜩 줘야 할 곳은 주고 싹 빼야 할 부위는 빼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리거나 궁사 자신이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또한 흉허복실(胸虛腹實)이라 했으니, 가슴은 텅 비우고 배는 꽉 채워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뜻밖의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힘을 잔뜩 실어야 할 부위는 힘을 주고 빼야 할 부위의 힘은 싹 뺀다는 게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도 쉬운 것은 아니다. 만약에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면 정반대가 되기 십상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궁도는 태권도나 유도와는 달리 매우 정적이고 그래서 간단하고 쉬운 것 같지만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란 얘기이다. 사대에 선 궁사는 조용히, 가만히 선 채로 신체의 온갖 부위를 점검한다. 발꿈치는 안녕하신지, 종아리 근육은 이상이 없는지, 등뼈와 갈비뼈는 제대로 작동을 하겠는지, 등등 관절과 근육 그리고 신경세포와 미세혈관이 배치돼 있는 모든 부위를 자발스럽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본 뒤에서야 가슴을 비우고 시를 꺼내 시위에 건다.

 

▲ 심판은 더 춥다.
▲ 결국 두 명씩 쏘기로 했다.

 

점검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발시를 하면 당연히 오차가 생긴다. 발시하는 순간 영점 1밀리의 오차가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과녁 앞에서는 적어도 오십 센티미터, 많게는 삼사 미터, 심한 경우는 자기 과녁이 아닌 남의 과녁 앞으로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뿐만이 아니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인대가 늘어지거나 탈골이 되는 등의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러니 어찌 춥다고 뭔가를 마구 껴입을 것인가.

그래도 추운 것은 추운 것이어서, 사대에 선 궁사는 딱히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온 몸을 달달달 떨어댄다. 어떤 사람은 아예 이빨 부딪히는 소리까지 딱딱 내며 차례를 기다린다. 한 개조에 일곱 명씩 나란히 서서 각자 다섯 발씩 세 번을 내야 하니, 한 사람이 최소한 1분은 잡아야 하고, 후딱후딱 마구 쏘아댄다 해도 한 순번을 다 돌기까지 최소한 30분, 세 순번을 다 돌자면 1시간 삼십 분이다. 바람도 맵찬 한겨울에, 손가락을 호호 불어야만 하는 영하 십일 도의 날씨에 과녁을 응시하며 가만히 서 있어야 하니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오전의 추위쯤이야 뭐 으레 그러려니 했다. 열두 시 즈음이면 싹 다 풀리려니 하는 믿음이 있었다. 믿음은 역시 믿음이었다. 틀리지 않았다. 점심을 끝내고 나서부터는 정말로 온풍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나 여기 있었거든, 하는 듯이 눈발이 나부끼기 시작하더니 바람도 좋다고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숨도 한 번 제대로 돌릴 틈을 주지 않고 시베리아 급 칼바람이 되어갔다.

바람 맞은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다. 코에서는 콧물이 줄줄 흐르고, 손가락은 마비라도 된 듯 말을 안 들어주는 탓에 호호 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은 모자를 써 보기도 하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지만, 그때 그 순간뿐이라서 이내 벗어버린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또 웃겨서, 서로가 서로의 콧물을 보면서 놀리고, 웃어대기는 한다.

 

▲ 고창 궁도인의 상징
▲ 고창궁도연합회 임원들

 

하지만 웃음조차도 추위 앞에서는 맥을 못 쓰고 무너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마치 무슨 죽음이 예정된 전장터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어깨마저 잔뜩 수축돼 버린 듯 시위가 당기지를 않는다. 간신히 어떻게 발시를 했다 해도, 시는 과녁을 훌쩍 넘어버리거나, 과녁 근처에도 못 가서 떨어져 버리거나, 심지어는 바람에 실려 멀리 어디로 날아가 버린다.

“워매, 귀때기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어야.”

“야 이거 진짜 심각하네, 심각해.”

누구랄 것도 없이 한 마디씩 해 보지만, 그렇다고 누가 달리 무슨 신기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발이 나부낀다고, 바람이 분다고, 몸이 좀 떨린다고 시작한 대회를 중단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 생각 같은 것은 아예 해보는 사람도 없다. 무조건 끝을 봐야 한다. 그게 궁사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만, 아 너무하다. 날씨는 점점 더 맵차져 간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고 나선 것만 같다. 인간과 대결을 해보자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이고 안 되겠소 야. 두 명씩만 나와서 쏘기로 합시다.”

누구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그런 신기한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디어는 즉석에서 채택되었고, 그리하여 두 명이 나와서 쏘고 들어가면 다시 또 두 명이 나와서 쏘고 들어가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회가 시작되었다. 궁사로서의 꼿꼿한 자존심이 퍽퍽 무너지는 순간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는 하지 않았다. 하긴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자연계의 법칙이란 그렇게도 막강한 것을.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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