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 그치면 새로운 길이 보일 거야
이 비 그치면 새로운 길이 보일 거야
  • 구혜리 기자
  • 승인 2018.02.20 1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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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칠순 할머니와 일본으로 떠난 여행길-3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 일본에서 렌터카를 빌리겠다는 계획에도 쉽게 승낙을 얻은 것부터. “차는 빌렸고?” 도리어 엄마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나는 J항공사가 제공하는 기타큐슈행 탑승 이벤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내용인 즉슨, 기타큐슈 공항에 도착한 J항공 승객에게는 편도 700엔짜리(한화 약 7000원) 리무진 버스를 무료 탑승할 티켓을 주었고, 기타큐슈 공항점의 렌터카를 제휴 할인가 24시간에 1000엔(한화 약 만원)으로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통상 렌터카를 빌리려면 적어도 5만 원 이상은 든다. 그러니 항공사 제휴 이벤트를 ‘줘도 못 먹는’ 일은 있어선 안 되었다.

나름대로 계획도 잘 세웠다. 기타큐슈 도착 첫 날 할머니와는 무료 리무진 버스를 타고 도심을 가볍게 다니고, 둘째 날엔 혼자 일찍이 공항으로 갔다가 렌터카를 받고 호텔로 돌아와 할머니와 온천욕 드라이브를 즐기겠다는 것이다. 렌터카 업체로 문의 메일과 전화로 예약확인도 꼼꼼히 했다.

 

 

다행히 비가 개었다. 고쿠라 중심가에 위치한 호텔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 구름이 조각조각 부셔졌고, 사이사이로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이른 아침 기타큐슈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비가 갠 하늘을 마주한 감동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직 혼자서 낯선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이른 새벽 몸을 사리며 어제 타고 온 리무진 버스에 올랐을 때, 어떤 개운한 쾌감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아… 이게 탑승권 발행일에만 이벤트가로 제공이 가능하고, 오늘은 하루가 지나서 혜택 제공 대상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분명 한국에서는 안내되지 않은 규정이었다. 혹시 몰라 미리 메일과 전화로 몇 차례 예약 확인 답변을 받기도 했었다. 오늘 드라이브에 맞춰 계획한 일정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도 몇 차례 계획을 바꾼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할머니가 걱정이다. 어떻게든 사정을 전달해야 했고 공항 내 배치된 한국인 통역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렌터카 측의 입장은 단호했고, 이벤트 적용 없는 비용으로 일 10만 원을 제시하더라. 에라, 그 돈이면 차라리 택시타고 맛있는 걸 더 먹겠다 싶어 등을 돌렸다.

“어떡해요… 일본인이 그런 쪽으로는 깐깐하더라고요. 제가 다 죄송하네요. 좋은 여행으로 잘 마치시고요, 저기 이거라도.” 다른 렌터카 업체에까지 문의를 도와준 이 통역관은 내 또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벌써 일본에서 일터를 꽉 잡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리무진 무료 티켓 한 장을 내 손에 쥐어 주며 그렇게 격려했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내 속도 모르고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조각구름도 옅어져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나마 비가 그쳤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계획이 틀어진 것에 좋은 쪽으로 말씀해주셨다. 굳은 렌트비로 맛있는 걸 많이 먹어야지 싶어 호텔에서 브런치를 먹고 또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첫 일본 여행에서 ‘모츠나베’에 홀딱 반한 뒤론 일본에 올 때마다 모츠나베를 꼭 먹고 간다. 이곳 기타큐슈에서 모츠나베로 유명한 ‘콜라겐 소호텐(Kollagen sohonten)’은 기타큐슈 소재 5,497곳의 음식점 중 랭킹 1위를 차지한 음식점이다.(Trip advisor 순위제공) 모츠나베는 일본식 곱창전골로, 한국에서 정통 모츠나베를 찾기 어려운 것처럼 일본에서도 지역마다 조금씩 맛과 특색이 다르다.

 

 

사실 대부분의 모츠나베는 가격이 비싼 편이다. 콜라겐 소호텐도 인기 레스토랑인 만큼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다만 런치 비용과 디너 비용에 간격이 크다. 런치 정식으로 1인당 1500엔(한화 약 15000원)인데 비해, 디너의 경우 자릿세가 붙어 인당 3만 원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렌터카로 일정으로는 시간이 애매해 계획에서 제외했던 콜라겐 소호텐을 런치로 갈 수 있게 됐다. 기쁜 마음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뚜벅뚜벅 앞장섰다.

식당 1층은 빙수를 메인으로 하는 카페고, 2층은 모츠나베 전문점으로 운영된다. 특히 다다미방으로 분리돼 프라이빗한 좌식 공간으로 꾸며져 있어 전통적인 멋이 물씬 풍긴다. 배가 불렀지만 달콤하고 부드러운 곱창에 번지르르한 윤기를 보니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다. 진하게 우러난 뜨거운 국물을 들이키니 오전에 쌓인 긴장이 풀린다. 메인요리뿐 아니라 일본 가정식과 가지각색의 취향을 고려한 밑반찬을 뷔페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할머니는 다소곳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담은 주인 부부를 ‘모델 같다,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다, 맛있다 예쁘다는 말이 일본어로 무엇이냐’는 말들로 호평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배가 부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틀림없다. 배는 무거웠으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고쿠라 역을 중심으로 관광 가게들이 퍼져 있는데, 전날보다 긴장이 풀린 할머니는 반짝이는 일본의 물건들을 살뜰히 둘러보고 만져보았다. 또 걷다 마주친 또래 할머니를 향해 “고쿠라!”하며 호탕한 웃음으로 인사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하시더니 몽글몽글 신발 가게에 모여 있는 일본 할머니들 사이로 들어가 “맞아, 맞아 이게 좋아, 튼튼해 보여”하고 한동안 대화를 이어가는 게 아닌가.

그 날 알았다. 우리 할머니가 그렇게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분이셨다는 걸. ‘할머니’라는 껍데기를 벗어 던진 채 만난 나의 친구이자 가장 사랑하는 연인은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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