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끝나도 평화의 촛불은 계속된다
올림픽 끝나도 평화의 촛불은 계속된다
  • 가톨릭일꾼 김경집
  • 승인 2018.02.2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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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김경집 칼럼

거의 한 달 동안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동계올림픽이 거의 끝나간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위태로운 순간도 부지기수였지만 다행히 역대 동계올림픽 중 가장 많은 나라가 참가했고 세계를 감탄하게 한 개막식을 비롯해서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경쟁과 축제로 지구를 평화롭게 만들었던 올림픽이었다.

어떤 이들은 평창올림픽이 아니라 ‘평양’올림픽이라며 빈정거리고 그 패거리에 속한 어떤 정치인은 남북단일팀이 올림픽 규정에 어긋난 것이라며 제소하는 편지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보내기도 하는 등 축제도 열리기 전 스스로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는 짓마저 서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올림픽은 열렸다. 그것도 멋지고 감동적으로.

 

▲ 사진=청와대 제공

 

북한 핵을 두고 남북이 대치하고 미국은 마치 퇴로를 차단한 듯 이른바 코피 전략 운운하며 협박하고, 일본은 거기에 편승해서 우리의 민방위훈련처럼 미사일 대비 훈련 호들갑을 떨며 보수 우익의 가치에만 몰두하는 등 올림픽 전후의 상황은 거의 최악이었다. 다행히 극적으로 남북단일팀이 성사되었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올림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수들이 뛸 수 있는 기회를 북한선수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건 불공정의 문제라고 시비했다. 그럴 만도 했다. 어른들은 늘 전체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는 것쯤은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았지만 젊은 세대들의 생각까지 동일하지는 않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 때문에 대통령의 지지도까지 내려갔다. 그러자 그것 보라는 듯 확대 재생산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세력들도 있다. 심지어 어떤 대형교회에서는 남북대화를 멈추게 해야 한다며 신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했다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까지 벌어졌다.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다.

그러나 일단 올림픽이 시작되고 최선의 경쟁을 펼치며 감동을 주는 모습에 모두들 흠뻑 빠졌다. 만약 올림픽 직전에 북한과 대화가 불발되었다면 어땠을까? 남한에서는 올림픽이 열리지만 북한의 핵 위협은 더 극적으로 도드라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위기상황 때문에 올림픽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그토록 마음껏 즐기고 세계와 호흡한 올림픽이 지금처럼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언론은 그런 점을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칫 남남갈등을 부추긴다는 둥 한미 공조에 금이 가는 위험한 선택이라는 둥 허튼 소리만 지껄였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들이 여론을 형성하는 주류라는 듯 행세했다. 웃기는 일이다.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생산적이고 미래가치를 이끌어내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왜곡도 마다하지 않는 수구성을 보였을 뿐이다.

설왕설래도 많았지만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걸 자꾸만 이념적 대결구도로만 보는 데에 익숙한 수구적 세력들이 폄훼하고 방해를 일삼았지만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동계올림픽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을까? 겨울왕국의 ‘얼음 같은 올림픽’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평화는 참을성을 갖고 쌓아가야 이루어지지만 단 한 번의 어리석은 판단으로도 깨질 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밥 먹듯 하는 자들이 준동한다.
 

메달리스트는 있어도 패자는 없다

정작 나는 이번 올림픽 중계를 라이브로 본 적이 별로 없다. 국가지상주의나 메달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싫기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희비가 갈리는 것을 보자면 심장이 쫄밋거려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껏 거대한 축제를 열어 세계의 여러 선수들이 다양한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오로지 우리나라 선수들 위주로만 중계하는 것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도 메달 획득 가능성이 있는 종목들 위주다.

그래도 이번 올림픽을 통해 감동적인 장면들을 즐길 수 있었다. 생소한 컬링 경기가 설 명절에 중계되어 새로운 재미를 누렸을 뿐 아니라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지만 여자아이스하키에서 남북단일팀이 보여준 모습은 경기력뿐 아니라 한반도의 젊은이들이 체제와 이념의 대립을 넘어 함께 융화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우려와는 달리 남북의 선수들은 한 팀이 되어 멋지게 최선을 다했다. 이미 그것 자체로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도 예전에 비해 사람들이 메달 가능성이 있는 종목에만 집중하지는 않는 모습이 반갑다. 그러나 TV는 여전히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해서 정작 이 땅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다양한 종목과 세계적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을 보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나는 우리나라 선수의 메달 획득 전망이 별로 없는 경기를 주로 봤다. 주목은커녕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목적점을 향해 달리는 모습은 이미 그 자체로 감동이다.

메달이라도 딴다면 여러 혜택이 주어지겠지만 그런 가능성조차 없음에도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모습은 분명 이전과는 달라진 풍경이다.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해서 보는 내내 흐뭇했다.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도 그들이 올림픽 선수였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그러나 본인들에게는 이미 그 자체로 최고였다는 자부심을 갖고.

앞서 말했지만 여자아이스하키는 이미 그 자체로 감동이다. 운동경기 가운데 골품제(실력에 따라 A, B, C, D의 등급을 매겨 리그를 운영한다. 월드컵처럼 시드로 배정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등급이 다르면 껴주지도 않는다)를 따지는 매우 극소수의 경기인 아이스하키에서 우리나라는 성적으로는 출전하기 어려웠지만 개최국이기 때문에 출전할 수 있었다.

어차피 메달은 솔직히 기대 밖의 일이다. 그래도 선수들은 오로지 아이스하키에 대한 애정으로 뭉쳤다. 제대로 된 실업팀조차 없는, 그야말로 척박한 환경에서 열정과 사랑만으로 몇 해를 견뎠다. 아이스하키가 좋아 자비로 유학까지 가서 거기에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던 골리 신소정 선수는 7년 동안 그토록 좋아하던 햄버거마저 끊었단다. 오죽하면 비록 전패의 성적이었지만 가장 감동적이었던 아이스하키 모든 경기 일정을 마친 뒤 햄버거를 마음껏 먹고 싶다고 했을까.

우려와는 달리 남북단일팀은 서로 챙겨주고 격려하며 경기에서 서로 헌신적이었고 목이 터져라 자기 팀을 응원하며 경기가 끝난 뒤 서로 얼싸안고 눈물 흘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먹먹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메달을 따지 못했고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으며 단 2골밖에 넣지 못했지만 우리는 모두 그녀들이 펼친 감동에 행복해했고 함께 감동했다.

승자는 있어도 패자는 없다. 그것이 올림픽의 가장 큰 감동이다. 이제는 경기에 진 선수들에 감동하고 그들을 격려하며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 승부가 끝나면 적이 아니고 친구가 되는 스포츠에서 배워야 한다. 평화에는 패자가 없다. 평화를 깨뜨리는 자가 패자다. 그 평화를 깨뜨리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평화를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물론 올림픽이 끝난 뒤 정세는 어떻게 급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이번 올림픽은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고 또 이후에도 그런 변화가 긍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존의 냉전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득권 지키기에만 혈안인 수구 언론의 노골적인 다리 걸기는 더 거세질 것이다. 그들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북한 응원단이 숙소에서 남한 TV를 시청했다거나 현송월이 무엇을 먹었다 따위의 것들을 뉴스랍시고 보도하는 데에만 골몰했던 자들이다. 어떻게라도 흠집을 내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시민들이 성숙해지는 게 두려울지 모른다. 자신들의 왜곡된 뉴스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각성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두려울 것이다. 그럴수록 더욱 저항할 것이다.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누렸던 온갖 이익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신문이나 뉴스의 헤드라인 문구 하나에서도 그런 목적을 드러낸다. 올림픽의 와중에 터진 ‘미투 운동’에서 연출가 이윤택의 충격적인 행태를 전하면서 그를 ‘문재인 대통령의 친구’라고 타이틀을 달 정도의 사고방식이다. 정작 이른바 장자연 사건의 핵심인물이 자사의 대표였다는 점은 애써 외면하고 뭉개면서.

올림픽은 끝난다. 날마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축제가 끝나면 허탈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허탈할 여유도 없다. 하루하루가 미래의 명운을 결정하게 될 중요한 시간들이다. 평화는 구걸하는 것도 거저 얻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시민이 침착하고 차분하게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쓰레기 같은 언론을 시민이 냉정하게 구별하고 퇴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평화를 방해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익마저 팽개친다. 그런 자들의 엄호로 이른바 방산비리가 줄곧 터지는 것이다.

종교는 대결과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못자리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수구 언론의 눈치나 보거나 거기에 편승하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눈을 부라린다. 아무리 미사 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주억거려봐야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공염불이다. 겨우 살려낸 평화의 불씨를 꺼뜨리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할 시간이다.

“주님께서 구해 내신 이들이 돌아오리이다.
환호 소리와 함께 시온으로 들어서리이다.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의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이다.”(이사 51, 11)

거짓 예언자들을 가려내야 한다. 등 뒤에 칼을 감추고 양의 탈을 쓴(양의 탈을 쓴 늑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스스로가 양이라고 착각하는 늑대다) 악당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지금도 곡필(曲筆)을 휘두르고 제단에서 꼬인 혀로 어리석은 생각을 지껄인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 27)

그냥 기도하고 교회에 충성하면 평화를 얻는 게 아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화를 세상에서 실천하고 그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 어둠의 세력을 과감하게 걷어내고 진정한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 올림픽 성화의 불은 꺼져도 우리가 지핀 평화의 촛불이 환히 비추도록 해야 한다. 그게 올림픽을 통해 우리가 누린 감동을 이어가는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된 실존이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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