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꿩보다 닭이 맛있을 때도 있다
때론 꿩보다 닭이 맛있을 때도 있다
  • 구혜리 기자
  • 승인 2018.02.24 1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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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칠순 할머니와 일본으로 떠난 여행길-4

온천 찾으러 산 넘어 산

고쿠라 역에서 JR을 타고 ‘야하타’ 역으로 갔다. 기타큐슈에서 대중적인 온천으로는 ‘아지사이노유’, ‘라쿠노유온천’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해안가 인근의 현대적인 건축 외관을 보이는 라쿠노유온천보다는 깊은 산골 속 노천 온천이 있는 아지사이노유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렌트카를 준비했던 것인데, 계획이 무산되었으니 제 2방안으로 온천 측에서 제공하는 송영버스를 타기 위해 야하타 역으로 간 것이다. ‘히야~ 이런 데 테마파크가 다 있네.’ 야하타 역에 도착하기 한 정거장 전 차창 너머로 ‘스페이스-월드’의 놀이기구가 펼쳐졌다.

 

 

 

야하타 역에서 온천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무료 제공되는 송영버스는 오후 2시 시간대에는 점심시간으로 휴식을 갖는다. 그런데 아차, 쇼핑하고 먹고 노는 걸로 희희낙락하는 동안 이걸 깜박하다니. 3시 버스를 타기까지 한 시간 정도 붕 뜨게 되었다. 정확한 탑승을 위해 탑승 위치를 파악하고, 가까운 커피전문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버스 정거장에 붙은 안내문이 조금 찜찜했지만 깔딱깔딱한 휴대전화를 충전하며 커피를 마실 여유부터 확보하고 싶었다.

 

 

노란 벽담에 빨간 지붕이 있고 출입문 옆으로 커다랗지만 귀여운 곰 모습의 조각상이 있었다. ‘COFFEE’ 라고 간판에 쓰인 반가운 글자를 보니 마음이 풀어져 별 고민 없이 문을 열었다.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주인 할머니 두 분이 우리를 맞이했다. 카페는 꽤나 옛날 ‘다방’스러운 곳이었다. 안쪽 방 쪽으로 희미한 담배냄새가 배어 있고, 입구 쪽으로는 화려한 꽃과 풀이 그나마 상쾌한 공기를 만들고 있었다. 어항이 놓여야 할 것 같은 자리는 만화책이 빼곡빼곡 꽂힌 책장이 서 있고, 책장을 너머 좌우로 소파 테이블과 바(Bar) 공간이 나뉘어 있다. 메뉴도 간단했다. 우리는 노장의 호스트에게 “아주 맛있다”고 추천 받은 다방 커피를 두 잔 주문했다. 역 앞에 카페라 그런지, 젊은 사람들도 곧잘 들어왔다.

 

두 번째 날벼락

핸드폰을 충전하며 커피 향을 맞이하자 여유가 생겼다. 그때 버스정류장에 붙은 안내문의 꺼림칙함이 뇌리를 빠르게 스쳤다. 카페의 두 마담은 각자 해야 할 일에 열중이었다. 한 사람은 TV로 뉴스와 예능방송을 번갈아 보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실내 곳곳에 퍼진 화분에 물을 주거나 잎을 닦았다. 두 호스트를 향해 ‘아지사이노유 온천’에 대해 물었다. 한 사람은 여전히 TV를 응시하며 다음 프로그램을 찾아 리모컨을 돌렸고, 한 사람은 무료함을 달랠 상대를 찾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치아가 드러나게 활짝 웃으며 답했다. 짧은 커트의 흰 머리가 인상적이고 늘 웃음꽃을 피운 자국이 얼굴에 깊게 배어있는 여성이었다.

 

 

“그럼그럼, 알고 말고. 아주 좋은 온천이지.”

“그런가요. 사실 저희가 오늘 그 온천에 가려고 하는데요.”

“할머니랑 둘이! 오오, 그래서 여기까지 왔구나. 좋은 온천이야.”

“요 앞에서 송영버스를 타면 되죠?”

“맞아, 맞아. 아~ 그런데 오늘은 갈 수 없어. 보수 공사 중이라 문을 닫았거든.”

아아!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두 번째 벼락을 맞은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호스트는 계속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다. 얼핏 ‘가까워’ ‘스파’ ‘추천’ 이라는 단어를 듣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여행에선 모든 인연이 소중하다

“잠깐, 잠깐, 대신 가까운 스파가 있어. 거기 가면 돼.”

“가까운가요? 택시?”

“응응, 가까워. 아니아니, 버스 타고 가면 돼.”

황급히 구글 검색을 하려는 나를 붙잡고 그녀는 창밖의 버스정류소를 가리킨다. 아지사이노유 온천의 송영버스와 같은 위치다. 알고 보니, 아지사이노유의 공사로 인해 운영은 중단했으나, 허탕 친 관광객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기존의 무료버스 운행을 가까운 ‘Sea Side Spa’로 대체해 유지하고 있었다.

Sea side spa는 한국인 관광객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아 리서치조차 어려운 곳이었다. 발가벗은 외국인이 돌아다니는 것이 생소한 곳. 하지만 다행히 계획했던 아지사이노유와 비교해 규모가 작지 않았고, 노천탕이 있다. “딱히 혜리가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텐데 말야. 할머니는 여기도 저기도 굉장히 좋은걸.” 손녀딸이 하루 종일 기운이 솟았다 쳐졌다 반복하는 걸 지켜봐온 할머니는 때로 차선책이 최선책이 되는 법이라 말씀하셨다.

 

 

호스트의 친절한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왔다. 카페 마스코트 곰 동상과 야하타 역을 배경으로 할머니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무래도 웃는 사진이 예쁘긴 하네.” 사진을 찍을 때 주름이 진다고 웃는 모습을 부끄러워하던 할머니가 당신의 사진을 보며 말씀하셨다. 셔틀버스 기사의 유쾌한 친절에도 낯설지 않았다, 일본의 작은 풍경들에 물들었다.

마침내 온천에 도착했을 때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도리어 그편이 훨씬 인상 깊게 나눌 이야기가 되었다. 할머니와 첫 일본 입욕에 티켓을 받는 것도, 천막을 재치고 입장하는 것도 유리병에 담긴 우유를 뽑아 먹는 것도 모두 신이 났다. 보글보글, 달궈진 노천탕 안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복잡했던 생각이 잦아들었다. 목욕하는 이 순간만큼은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가만 생각하니, 계획대로 차를 렌트했다면 낮에 맛 본 환상적인 모츠나베를 먹지 못했을 것이고, 야하타 역의 다방에서 호스트의 조언도 듣지 못했을 것이며, 공사판 먼지로 희뿌연 산골짜기 온천에 덩그러니 도착해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확 돋았다. 잔뜩 흐트러져 있었으나 어느 하나라도 빗나갔다면 엉망진창이 되었을 완벽한 짜임새였다, 누가 계획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이런 얘기를 풀어놓자니 할머니는 이때다 싶어 손을 잡고 기도하자는 신호를 보낸다. Sometimes plan B is better than plan A. 때론 꿩보다 닭이 맛있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치킨은 항상 옳다. 하하) 물론, 또다시 계획에서 벗어났더라도 우리는 그 나름대로 또 다른 이야기를 잘~만들었을 것이다.

할머니도 여행 취향이 맞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관광지보다는 생전 처음 보는 동네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남들이 좋다는 것,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경험이고 더 나은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차이와 연결고리를 찾는 즐거움에 흠뻑 젖어버리는 이 여행 습관을 저버릴 수가 없게 돼버렸다. 우린 다시 우리만의 일상으로 돌아가, 나는 20대로서의 할머니는 당신으로서의 삶을 꾸려나가기 바쁘겠지만 그 일상은 이미 예전 것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깊은 떨림과 전율을 맛보았던 작은 일탈, 선물 같던 추억, 짙게 남은 향수를 더듬으며 다시 서로를 찾아 그 때의 이야기를 나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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