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휘어져 올라간 가지 끝에 담상담상 저 격조 높은 꽃망울!
구불구불 휘어져 올라간 가지 끝에 담상담상 저 격조 높은 꽃망울!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8.02.2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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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록 에세이> 매화와 함께 찾아온 봄

긴긴 겨울도 성큼 다가온 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즈음이다. 남녘에는 진작 봄기운이 스며들었고 봄을 알리는 꽃들도 하나 둘 봉오리를 내밀고 있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가냘픈 매화 한 송이. 꽃샘바람 속에 홀로 피어나서 저마다의 마음에 생기를 가득 불어 넣어주는 꽃 중의 꽃!

고목(古木)의 가지 위에 꽃봉오리를 살며시 연 모습이 그렇게 앙증맞을 수 없다.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운다 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아왔던 매화의 속뜻. 이 어찌 대견하고 귀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옛 구조라초등학교 교정에 핀 춘당매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매화의 여린 꽃눈. 매화를 보면 마음이 그지없이 다사로워진다. 매화는 아무 데서나 볼 수 없는 꽃이어서 더 가슴 사무치게 다가오는가. 그 자태가 사뭇 화려하면서도 고혹적이지만 뭇 사람들을 유혹해 어지럼증을 일으키지 않는다. 제 분수를 안다고 할까. 늙은 등걸에 푸른 이끼가 비늘처럼 돋아 있고, 한 가지에 듬성듬성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모습은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하다.

이른 봄에 흰빛, 연한 붉은빛으로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운다. 사진이나 그림, 장식무늬에 자주 등장하는 매화도 실제 모습을 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쉽게 볼 수 없는 만큼 어쩌다 그 모습을 대하면 한없이 반갑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품격과 절제와 맑음을 겸비한 매화에 견주어 나란 존재는 얼마나 가벼운가.

인고와 명상이 피운 꽃이라 했다. 매화의 이미지는 늘 우리들을 잔잔한 그리움 속으로 안내한다. 온갖 풍상을 다 견뎌낸 생명체답게 어디 한 군데 흐트러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벚나무과에 속하는 매화는 예부터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로 대접받아 왔다. 꽃의 자태가 단아하고 그 고결함이 군자와 같다고 하여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엄동설한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아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에 들기도 한다.

옛 사람들은 매화를 ‘생각하며 피는 꽃’이라 했다. 또한 매향(梅香)을 ‘귀로 듣는 향기’라 했는데, 이는 매화향이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 준다는 뜻과 함께 떨어지는 꽃잎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해야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매화의 미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닌가 한다.

이른 봄 다른 꽃보다 먼저 봉오리를 터뜨린다고 해서 화형(花兄), 화괴(花魁), 백화괴(百花魁)라는 별명이 있다던가. 화형은 먼저 피는 것이 형이 된다는 걸 의미하고, 괴(魁)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이외에도 매화의 다른 이름으로 청우(淸友), 청객(淸客), 옥골(玉骨), 일지춘(一枝春), 은일사(隱逸士)가 있는데 모두 그 청초하고 고결한 품성을 기려 이르는 말이다.

 

 

동매(冬梅)라 했던가. 눈 속에 핀 매화는 더욱 운치를 더한다.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날, 한 여인이 공원에 피어난 매화를 감동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맑은 표정을 보면서 동심을 생각했다. 재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매화등걸에 꽃송이를 그린 ‘소한도(消寒圖)’를 벽에 걸어놓고, 날마다 한 송이 한 송이를 채색하면서 봄을 기다렸다는 이가 있고 보면 매화는 분명 꽃 중의 꽃이 아닌가 싶다.
 

집안 가득 길쭉한 대 그림자와 얼리고(滿戶影交脩竹枝) 
한밤중 남쪽 문설주에 달이 떠오를 때(夜分南閣月生時) 
이 몸은 정녕 향기와 완전히 동화되어(此身定與香全化) 
매화에 가까이 대고 맡아도 전혀 알 수 없네(嗅逼梅花寂不知)
 

18세기의 시인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가 노래한 것처럼 매화는 그 어떤 것과도 잘 어울리니, 달이 떠오른 한밤에 맡는 매화 향기는 그 오묘한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해마다 다른 꽃들이 피기 전에 새하얀 꽃망울을 내밀어 봄 마중을 나온 이들을 설레게 하는가 하면, 바람결에 묻어오는 은은한 향기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달뜨게 한다.

일찍이 이태준은 ‘매화란 고운 꽃이기보다는 맑은 꽃이요, 달기보다 매운 꽃이다. 그러므로 색 있는 것이 그의 자랑이 못 되는 것이요, 복엽(複葉)이 그에게는 무거운 옷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매화는 늦겨울에서 초봄에 피는데 그 청초한 향기는 지친 영혼을 감싸준다. 애써 자신을 가꾸지 않아도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저 자태를 보라. 구불구불 휘어져 올라간 가지 끝에 담상담상 피어난 저 꽃망울!

땅에 씨가 떨어져 절로 나온 것을 강매(江梅)라 했다. 봄이 오기 전 흰눈 속에 핀다는 설중매(雪中梅)도 있다. 그 뿐인가. 열매가 일찍 맺는 것을 조매(早梅)라 하고, 가지가 구부러지고 검푸른 이끼가 낀 것을 고매(古梅), 꽃봉오리가 풍성하고 잎이 층을 이루면 중엽매화(重葉梅花), 가지와 줄기가 녹색이면 녹엽매(綠葉梅)라 했다. 한 꼭지에 두 개의 열매가 열리는 것을 원앙매(鴛鴦梅)라 하고, 둥글고 작은 열매가 열리면 소매(消梅)라 하였다.

또한 매화는 꽃 색깔에 따라 백매화, 홍매화, 청매화로 나뉜다. 홍매화는 백매화나 청매화와는 달리 꽃 색깔이 빛의 각도에 따라 수시로 변하고 향도 아주 진하다.

 

 

석양 무렵 먼 산을 배경으로 겹쳐서 바라보면 그 색상의 조화가 빼어나다. 또 꽃잎이 다섯 개보다 많은 것을 ‘많첩흰매화’, ‘많첩분홍매화’라 한다. 겹꽃보다는 홑꽃을 더 치고, 홍매보다는 백매가 훨씬 격이 높다. 주위에서 가끔 보게 되는 매화분(盆)은 꽃받침이 연초록인 단엽(單葉) 청매(靑梅)이다. 이를 ‘벽매’라고도 하는데 혼자 대하기가 아까울 만큼 기품과 운치가 있다.

매화의 고향은 남녘이다. 저 제주도에서부터 피기 시작해 신부걸음으로 남도의 여수에 닿은 뒤 순천과 구례를 거쳐 중부지방까지 줄달음친다. 제주의 매화는 보통 1월 중순께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해가 갈수록 피는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의 문제로 떠오른 ‘지구온난화’ 때문이다. 꽃을 보니 반가운 한편으로 마음 한쪽이 불편한건 무슨 까닭인지.

매화는 격조 높은 꽃이다.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욕심을 떨쳐버리고 고고하고 순수하게 피어나는 그 모습에서 순수와 결백의 미를 엿볼 수 있다.

눈과 달빛으로 핀다는 꽃. 봄이 와서 매화가 피는 것이 아니라 매화가 피어서 봄이라 했던가. 어느 시골집 흙담 가에 홀로 핀 매화를 보면서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아 본다. 저기 저만큼 봄이 손짓하고 있다. 그 손짓 너머로 매화가 방싯방싯 웃고 있다.

봄이 소 걸음처럼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작년 2월 하순경 거제에서 본 매화(춘당매)가 잊히지 않는다. 푸른 바다가 손짓하는 옛 구조라초등학교 한쪽에 화사하게 핀 춘당매는 나를 그리움의 세계로 안내했다. 전국에서 가장 빨리 꽃을 피운다는 매화를 보기 위해 수십 명의 방문객들이 매화나무를 둘러싸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령 120~150년을 헤아리는 이 춘당매는 매년 1월 10일경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2월 하순경 만개한다. 남쪽으로 봄 마중 갈 계획이 있다면 꼭 한번 들러보길 권한다.

아, 정녕 봄은 왔는가. 매화 같은 올곧음과 운치와 격조와 고고함을 내 마음속에 맞아들이고 싶은 이즈음이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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