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사온 빨강 노랑색 옷 그리고 몰려든 동네사람들
어머니가 사온 빨강 노랑색 옷 그리고 몰려든 동네사람들
  • 김덕희
  • 승인 2018.03.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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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그 싸립문 밖에 서 있던 이들은 바로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나의 친여동생, 그리고 외삼촌이셨던 것이다. 처음이었다. 태어난 이후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내 기억속에 어머니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너무 어릴 때 집을 떠나신 상태여서 전혀 기억에 없던 것이었다. 그 어머니가, 내 앞에 나타났다니….

외삼촌이 나를 불렀다.

"덕희야, 일로와 인사해야지…이 분이 너의 어머니야!"

난 재빠르게 아버지 등뒤로 숨었다. 그리고 아버지 몸 좌우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아버지와 둘이 살면서 어머니 얘기를 전혀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 입에서 나온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셔서도 단 한번도 어머니 얘기를 내 앞에서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머니 얘기는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아주머니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니 엄마가 왜 집 나갔는 줄 아냐? 그 어려운 살림 잘꾸려가면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다 니 아버지 술 주정 때문에 결국 집을 나가고 만 것이다. 조금이라도 크면 꼭 어머니 찾아야 한다…."

그런 어머니가 내 앞에 나타나셨다는 게 도대체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내 기분과 상관 없이 어머니 얼굴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동생. 조그마한 단발머리를 한 꼬마아이. 엄마의 손을 잡고 주위를 뱅뱅 돌면서 나처럼 멀뚱멀뚱한 눈으로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그 아이. 외삼촌이 나를 가리키며 "오빠야, 어서 가봐라" 하는데도 그저 야릇한 표정만 한 채 그저 그렇게 맴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외삼촌.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도 "아이고, 우리 덕희 많이 컸구나"하면서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런 분위기가 멋쩍었는지 아버지는 종이에 가루 담배를 말아 피우시며 연거푸 담배연기 섞인 한숨만을 내쉬고 있을 뿐…. 어머니도 말이 없으셨다. 그저 하염없이 나 만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셨다.

 

 

훗날 들은 얘기에 의하면 어머니가 집을 나간 건 내가 세 살 때였다. 이유는 동네 아주머니의 얘기가 맞았다. 하루도 그침없이 계속되는 아버지의 술버릇. 먹을 양식이 떨어져도 아버지는 오로지 술만 마시며 거들떠 보지도 않으셨다. 어머니가 남의 집 품을 팔아가며 보리쌀도 얻어오고 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 보리쌀을 들고 시장에 나가 팔아 술을 사 드시곤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제 세 살 된 아들과 갓 태어난 딸까지 있던 입장에서 생활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어머니는 수십차례 아버지에게 간청을 했다. "아이들 봐서라도 이제 제발 정신 차리고 술 좀 그만 마시라"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구박 뿐.

결국 참다 참다 못한 어머니는 집을 나가기로 작정을 하신다. 이대로는 당신은커녕 아이들까지 굶겨죽을 판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건 한겨울. 폭설이 초라한 초가집을 뒤덮을 정도로 많이 내린 날이었다.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을 둘 다 데리고 친정인 경남 통영으로 가려 했으나, 내린 눈 때문에 도저히 한꺼번에 둘을 다 데리고 갈 수 없었다.

결국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갓 태어난 딸아이만 등에 업은 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집을 나섰다.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 하긴 겨우 세 살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친정집에 가서 날이 풀리면 다시 나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친정집 상황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년을 지나고, 2년을 지나고 그러다보니 내가 아홉 살이 되어서야 다시 우리집을 찾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아버지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때론 목소리가 다소 커지기도 했지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난 그저 내 여동생이라는 꼬마아이만 힐끗 힐끗 쳐다보며 마당과 부엌, 뒷마당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녔다.

어머니가 오셨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아주 조그만 마을인 당직골에 퍼졌다. 동네 사람들이 울타리 밖에 모여 우리 집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엄청난 구경거리라도 난 모양으로…. 그렇게 많은 동네 사람들이 우리집에 모여 든 건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어머니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집 뒤뜰에 있는 우물가로 데리고 가 옷을 훌라당 벗기더니 대야에 물을 받아 몸을 씻기셨다. 맨날 술에 젖어 사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보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 몸을 구석구석 씻기면서도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난 그저 멀뚱멀뚱 어머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몸을 다 씻긴 다음에 어머니는 나를 위해 준비해 온 옷을 입혔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빨간 반바지와 노랑색 반팔 셔츠였다. 난 그옷을 입지 않으려고 마구 떼를 썼다. 어머니에 대한 반감 보다는 그 옷 색깔이 창피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자옷 색깔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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