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김유철 칼럼

화양연화

영화 <화양연화>.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기억한다. 시대를 풍미했던 양조위, 장만옥이 출연한 중국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었다. ‘어떤 사랑’을 감독은 즐겁고, 황당하며, 애틋하게 그려냈다. 감독이 영화의 제목으로 택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문자 그대로 풀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으로 풀겠지만 그런 시간은 늘 아름다운 만큼 아픈 것 같다.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사가 그러하듯 하느님 안의 삶이 다르겠는가? 성속일체(聖俗一體)일 뿐. 모두가 그러하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1.1)는 첫 고백으로부터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22.20)이라는 끝 고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화양연화’ 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노자> 경전에서 거듭 말하는 거피취차(去彼取此) 즉 ‘저것을 피하고 이것을 취하는’ 일은 예수에게는 ‘좁은 길’(마태7.13)이었지만 교회는 좁은 길이 없는 화양연화만을 꿈꾸다 못해 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하는 때다. 좋은 시절 다 갔다.

 

양대인(洋大人)와 교안(敎案)

한국천주교회는 조선 정조 이후부터 고종까지의 종교박해 시절을 단 한마디, ‘순교’로 포장하지만 1886년 조선과 프랑스정부 사이에 맺어진 조불조약 이후로 ‘좁은 길’을 버렸다. 전교 200여년이 넘어오도록 거룩한 ‘순교’ 전통을 전가의 보도로서 말하지만 그것은 죽은 자들의 묘비 뒤에 숨는 위장막에 불과하다. 애초 교회가 마치 조약 이전 100년의 암흑기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선교자유를 통해서 조선 민중에게 들이민 것은 양대인(洋大人)의 도도한 이미지와 교안(敎案)이라는 일종의 갑질 사태였다.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낯선 수단(soutane)을 입고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냈으며, 프랑스인이라는 치외법권을 들어 천주교 신자를 적극 보호하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지방관의 권한을 무시하였고, 일반인들에게 사사로이 징계나 질책을 가하기도 하였다, 신자를 위협한 향반(鄕班)이나 백성을 사적으로 불러 경고하거나 형을 집행하기도 하고, 지방관의 권한을 무시하고 감옥에 갇힌 신자를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박해의 대상이던 선교사들이 이제는 ‘양대인’으로서의 위세를 행사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양대인자세(洋大人藉勢) 즉, 선교사의 위세에 의지하려는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신자가 되었다. …… 천주교회는 한국사회 내부로 스며들어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생활과도 긴밀히 얽히면서 ‘교안(敎案)’이라는 새로운 분쟁을 맞게 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4. 151-152쪽. 2011. 한국교회사연구소)

 

일본과의 만남. 불안한 조짐의 서막

‘교안’이라고 부르는 한국사회와의 분쟁은 수백 건에서 천 건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교안’은 일본의 식민지 야욕을 향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그 형태를 달리한다. 어쩌면 소리 없고 기록되어지지 않은 슬픈 역사적 교안은 여기에서 비롯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알다시피 을사늑약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의 내정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무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조약이었다. 조약에 대하여 민중의 반일 열기는 높았고, 전국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어찌하였을까?

천주교인 안중근 토마스는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을사늑약을 체결한 조선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안중근과 빌렘 신부의 면회를 금지하였고, 허가(?) 받지 않은 성사를 집행한 빌렘 신부에게 성무집행 정지를 명령하기도 했다고 스스로 일기(1910.03.15.)에 적기도 했다.

“교회통치권은 일제를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여 독립운동은 반정부 행위로 판단하고, 독립전쟁을 살인행위로 단정하였다. 모국인 프랑스가 이미 월남을 침략한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일제의 침략행위는 정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은 어디까지나 프랑스 국민으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펴고 있을 뿐이었으며, 그들의 일차적인 목적이요 최대 사명은 선교지의 영혼 구령이었다(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빅벨, 1998년, 767쪽). 오욕의 숨은 역사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병이 있다

<노자> 71장에 나오는 말이다. ‘夫唯病病(부유병병) 是以不病(시이부병)’이라고 하여 ‘다만 병을 병으로서 알면 이로써 병을 앓지 않는다.’고 그 뜻을 새긴다. 수천 년을 이어온 한민족에게 여러 번의 갈래를 통해 주님을 만나게 했고 결국 1784년을 주춧돌 삼아 한국천주교회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는 일이 허물을 거듭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우리의 교회 역시 그런 허물을 쌓아가는 것을 화양연화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였다. 꽃이 서둘러 피면 이내 지고 마는 이치를.

불과 230여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천주교회이지만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조차 없는 것이다. 우린 2000년 역사를 지닌 종교가 아니다. 오래된 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깨에서 힘을 좀 빼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는 분명 2000년 전 사람이지만 천주교회는 한민족에게 여전히 낯선 양대인(洋大人)이며 우리는 여전히 교세에 힘입어 헛힘을 부리는 교안(敎案)을 불러들이고 있다.

 

증세 일람표

한국천주교회와 각 교구가 시노드 등을 통해서 진단하지 않더라도 교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든지 짚어내는 병이 나타내는 증세가 있다. 그러나 병과 증세는 다른 것이다. 생활환경이나 음식이 불결하면 배탈이 나지만 배탈은 증세일 뿐 진짜 병은 따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병과 용감히 맞서야하고 치료하고 다시 건강한 상태로서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

성직을 앞세운 권위주의. 소통을 외면한 일방주의. 자본에 물든 배금주의. 물량에 몰두하는 확장주의. 독단을 넘어선 유일주의. 남성위주의 여성외면주의. 순교와 성지와 성인으로 일관하는 반역사주의. 가난을 몰아낸 이중적 외면주의. 전통과 전승으로 무장한 가톨릭근본주의. 민주주의와는 담쌓은 가톨릭예외주의. 아마도 그 많은 증세는 분명 하나의 병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노자의 말을 반복한다. “병을 병으로 알면 병을 앓지 않는다.” 머리에 재를 쓰고 한국천주교회와 천주교인은 인정해야한다. 어쩌면 서울역 앞의 반쯤 정신 나간 사람이 예언자처럼 우리를 보라고 하루 종일 디오게네스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들의 병명은 거기에 적혀 있다. “예.수.불.신!”

성추행. 비자금. 횡령. 감금. 독직 등등의 사회적 범죄를 저지른 한 명 한 명을 포함한 천주교인을 포함하여 우리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함께 쓰고 있다. 이제 겨우 234쪽이지만 우리가 써야하는 교회사는 1만 쪽, 아니 100만 쪽에 이르도록 장구한 세월이 남았다. 한국천주교회 좋은 시절 다 갔다. 자,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거냐? 거피취차(去彼取此)라.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잡아라!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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