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우리 집은 작은 초가집이었다. 앞뜰에는 조그마한 밭이 있었다. 그 밭엔 사시사철 호박이나, 파, 가지, 상추 등 온갖 야채들이 자라났다. 집 앞 쪽은 빙 둘러서 돌로 쌓아만든 오래된 담장에 싸리나무로 만든 대문이 있었다. 뒤뜰 쪽은 가느다란 싸리나무들을 엮어 만든 울타리로 돼 있었다. 그래서 집 밖에서도 집 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동네 친구들이 어머니와 내 모습 하나 하나를 다 구경하고 있었다. 조용한 산골 마을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벌어진 마냥, 그렇게 몰려와 신기한 듯 구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사 오신 그 빨간색 반바지와 노란색 티셔츠가 뭐가 그리 싫다고 그렇게 우겨댔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다.

게다가 어머니의 말투도 그 얼굴만큼이나 상당히 생소했다. 경상남도 통영이 고향이시다보니 경상도 사투리가 굉장히 심하셨던 것이다.

나는 처음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듣기 힘들었다. 내 이름을 부를 때도 "드키야!"하고 높였다가 낮아지는 식이었다.

하도 옷을 입지 않겠다고 떼를 쓰자 어머니는 "드키야! 음마가 니 주려꼬 사온 옷이데이…"하시면서 내게 옷을 입혀주시려고 애를 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빨간색 반바지와 노란색 티셔츠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우리 모자의 모습을 울타리 밖에서 구경하던 동네 친구들의 까르르 웃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다행히도 어머니 일행은 우리 집에서 정확히 4일을 묵었다. 그동안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다른 면에서보다 바로 먹는 음식 면에서다. 어머니는 거의 끼니 때마다 어디서 사 온 것인지 쌀밥을 지어서 내놓았고, 그 하얀 쌀밥에 각종 야채를 고추장과 함께 비벼서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란 걸 너무나도 잘 아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떻게 생활해왔을 것이란 걸 굳이 얘기듣지 않아도 훤히 꿰고 계신 듯 했다. 어머니가 외삼촌, 여동생과 함게 당직골에 나타나신 건 바로 나를 어머니의 친정인 경남 통영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머무르신 이틀째 되던 날 저녁, 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씀을 나누시는 걸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를 키울 능력이 되지 않으니 통영으로 데리고 가 나를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게 하겠다는게 어머니 얘기의 요지였다.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난 그 날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술 주정하시는 아버지일지라도, 매 끼니를 먹지 못하더라도, 난 아버지와 내가 태어난 이곳 당직골에서 지금까지처럼 사는 게 더 좋았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난 후 아버지께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그리곤 "이제 어머니를 따라가 동생하고 같이 살아라"라고 얘기하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단호한 어조였다. 하긴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의 술 버릇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하며 살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 아버지의 그 얘기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아무리 어머니라고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따라가 함께 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까지도 어머니에 대한 어떤 감정도 내겐 없었던 것이다. 그저 어린 나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속삭이던 얘기 속의 주인공이었을 뿐….

난 결국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집에서 족히 500미터는 떨어진 곳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다보니 외삼촌이 나를 잡으려고 쫓아오는 게 아닌가. 외삼촌에게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뛰다가 외부에서 동네로 들어오는 넓은 길을 벗어나 논두렁으로 들어섰다. 눈 앞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 나무위로 다람쥐 마냥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꼭대기 부근까지 올라갔다. 만약 외삼촌이 올라온다면 뛰어내려 죽어버리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다행이 외삼촌은 나무 위엔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나무 밑에서 날이 어두워지도록 나에게 얘기를 건네며 기다리셨다. 결국 외삼촌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이제 제발 내려와라. 내가 졌다. 너를 데려가지 않고 아버지와 그냥 함께 살게 해주겠다…."

하지만 외삼촌의 그런 약속에도 난 도대체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계속 나무 위에서 머물기를 족히 수시간, 나중엔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나무 아래로 오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약속까지 받고 난 뒤에야 난 나무에서 내려왔다.

나무에서 내려온 나는 어머니께 호되게 매질을 당했다. 아마도 어머니는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자식의 행동이 무척이나 가슴 아프셨던 것 같다. 밤 늦은 시간 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예상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