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혼들의 눈물,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원혼들의 눈물,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 이수호
  • 승인 2018.03.13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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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호 칼럼>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 박무덕씨

저는 지난 99주년 3.1절을 맞아 일제강제징용희생자 유해봉환위원회 봉환단장으로 일본 도쿄 근교의 국평사에 안치되어 있던 유해 중 33위를 국내로 모셔오는 일을 했습니다. 국평사는 1965년 류종묵 스님이 세운 절인데, 종전 이후 일본 여러 곳의 사찰에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들의 유해를 모아 연고자를 찾아 돌려주고, 아직 연고자를 찾지 못한 유해는 잘 안치하여 모시고 있는 절이었습니다. 이번에 모시고 온 33 위는 신원은 확인됐으나 연고자를 찾지 못한 분들로, 국적도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아닌 끌려갈 때의 국적인 조선으로 되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양쪽 정부가 나서서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고향 땅으로 잘 모셔야 할 한 맺힌 영령들이, 전쟁 끝나고 국권을 되찾은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돌아갈 곳 없는 억울한 원혼으로, 끌려간 나라의 구천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못한 종교단체 등 민간단체들이 나서서 일부나마 고국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유골함에 담긴 유해를 가슴에 안고 돌아온 분은 박무덕이란 1899년 생 강제징용노동자였는데, ‘국민징용령’이 떨어진 1939년 무렵 일본 어느 시멘트 공장으로 끌려가 노역에 시달리다가, 1941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맡은 이 분이 국평사에서 열린 일제강제연행 조선인희생자 유골봉환 추모법요 행사 때 사례로 밝힌, 조세이 탄광에서 수몰사고로 돌아가신 136명 중 한 분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2월 3일,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있는 조세이 탄광이라는 해저탄광에서 대규모 수몰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로 한꺼번에 숨진 183명의 희생자 중 70%가 넘는 136명이 조선인이었습니다. 그 중 4명은 10대였고 20대도 73명이나 되어 결혼도 못한 젊은이가 절반이 넘었다 합니다. 전쟁 중에 발생한 대형사고였는데, 다음날의 신문들은 “입갱자의 대부분이 구출되었다”는 허위보도를 함으로, 이 사고는 어둠 속에 은폐되었다고 합니다. 비밀 속에 묻혀 있던 이 사건은 30년이 훨씬 지난 1970년대 후반에야 지역 역사탐구자들에 의해 참극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1991년 3월에는 ‘조세이탄광 물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 회’라는 시민단체가 발족하여 그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합니다. 소수로 시작한 이 단체는, 정부나 기관의 도움 없이 회원들의 힘으로 사고현장을 보존하고, 사고의 실태를 분명히 하기 위해 사료나 증언을 수집하여 자료집을 만들고, 조선인을 포함한 183명 희생자 전원의 이름과 일본사람의 사죄와 반성을 새긴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끈질기게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새기는 회’가 출범한 지 22년 만인 2013년에 드디어 추모비가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바닷물 아래 37미터 지하에 수몰되어 있어서 아직 유해발굴은 못하고 있지만 ‘새기는 회’에서는 유해 발굴 및 반환을 다음 사업으로 잡고 진행 중이라고, 국평사 유해봉환법요에 참석했던 ‘새기는 회’ 대표가 눈물을 글썽이며 보고하던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박무덕 씨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새벽에 국평사를 출발했습니다. 강제로 끌려와 노역에 시달리다가 쓸쓸히 돌아가신지 77년이나 지났습니다. 남의 땅에서 찾는 이도 없고 연락할 곳도 없어 어느 이름 모를 절 구석에 방치되었다가 국평사에 안치되어 5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흰 천으로 감싸 목에 걸었지만 그 한 맺힌 억울함 때문인지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동경 하네다공항을 출발하여 김포공항에 내리는데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가까운 거리를 박무덕 씨는 돌아가시고서도 77년이나 지나고야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한 번 희생당하고 죽어서 또 한 번 희생당해 유해마저도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땅에 방치된 원혼들 중, 신원이 확인된 강제징용 희생자만도 40만이 넘는다니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아니 동족으로 부끄럽고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고 영혼이라도 편히 쉬게 해드려야지 하는 간절한 심정이, 이번 유해봉환을 위해 나선 모든 이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김포공항에 내리니 원혼들의 눈물인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조촐하게 공황 환향의식을 하며 귀국 보고를 드리고 고국 땅 이곳저곳을 돌았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가기 위해 집결했던 용산역에서 노제를 지내고 남산, 시청, 탑골공원, 광화문을 돌아 임시 안치소인 독립문공원 순국선열 위패 봉안사당에 이르렀을 때는 포근히 어둠이 내렸으나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내 품에 안겨 있던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 박무덕 씨의 유해는 일본을 출발할 때보다는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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