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었다 녹았다 하며 깊어가는 맛
얼었다 녹았다 하며 깊어가는 맛
  • 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
  • 승인 2018.03.13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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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장터의 겨울-겨울 장터의 베스트셀러는 동태
▲ “추울수록 잘 나가. 추와야 잘 폴려.” 추위가 고맙다는 동태전문 어물전. 일로장.

“냉장고 속이 더 따숩겄당께.”

웃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 ‘냉동실 추위’는 실화다.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는 것은 속담일 뿐.

“얼음옷을 몇 불로 입어불었어.”

영하 몇 도의 한파 속에 어물전의 모든 생선은 종류에 상관없이 다 한몸으로 꽝꽝 얼어붙었다.

“한 마리썩 일일이 뜯을랑께 어깨심이 겁나 필요해. 어쩌겄어, 심써야 묵고살제. 심 안 쓰고 되는 일이 있가디.”

나주 다시장 어물전 할매. 사는 것은 ‘심 쓰는 것’이라고, 내내 그렇게 살아온 이의 말씀이다.

“시한에는 동태가 질로 잘 폴리제. 추울수록 잘 나가.”

어물전 주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겨울 장터의 베스트셀러는 동태.

“녹아야 헌디 내논께 더 얼어부네.”

 

▲ “녹아야 헌디 내논께 더 얼어부네.” 난롯불 가까이 동태를 녹여보려 애를 쓴다. 오수장 강송자 할매.

 

임실 오수장 강송자(78) 할매는 애가 탄다. 할매는 꽝꽝 얼어서 어찌 해볼 수 없는 동태를 난롯불 가까이 대고 좀이라도 녹여보려 애를 쓴다.

“인자 며칠만 건너가문 되야. 인자 추우(추위) 다 지나갔어. 소한 대한 다 넘어갔어.”

단골 할매가 지나가다 “며칠만 더 건너가자”고 짐짓 응원의 말씀을 건네신다.

‘얼었다 녹았다’ 하는 것이 삶이라지 않는가. 시방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시절을 지나는 중이려니.

포 뜨기의 달인들도 꽝꽝 언 동태 앞에서는 애를 먹는다.

 

▲ “뜨기가 겁나 사나와. 얼어분께 칼이 안 들어가.” 오수장.

 

“한번 붙든 것이라 변동을 못하고 이날평상 이것만 한다”는 어물전 40년 경력의 할매한테도 난제.

“뜨기가 겁나 사나와. 얼어분께 칼이 안 들어가.”

이윽고 포를 뜬다.

“행님, 얼었어도 포는 좋게 떠졌어.”

설 명절 앞두고 큰 놈 두 마리를 전감으로 떠가는데 한 마리가 덤으로 딸려간다.

“저닉에 국 낄여드시라고.”

할매는 받은 돈 만원짜리를 머리에 갖다대고 한번 쓱 문댄 다음 전대에 넣는다. 마수했다는 의미다.

“인자 마수했네.”

새벽 6시에 나와 10시에 첫 거래가 이뤄졌다.

“아무리 추워도 열어야죠. 생업이잖아요.”

 

영광 법성포 선창 어물전의 김미성(47) 아짐. 진열대 위 어물들엔 눈이 반나마 덮여 모두 정체불명이다.

“이건 달고기. 몸뚱아리에 보름달마냥 동그란 무늬가 있어서 달 떴다고.”

달돔, 달병어라고도 하는 달고기는 겨울철 조깃배 그물에 같이 올라온단다. 빨간 신대도 눈을 한껏 뒤집어쓰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맵찬 바닷바람을 견디며 스스로 속이 깊어지는 중이다.

〈익을 대로 익은 홍시 한 알의 밝기는/ 오 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데,/ 내 담장을 넘어와 바라볼 때마다/ 침을 삼키게 하는, 그러나 남의 것이어서/ 따 먹지 못하는 홍시는/ 십오 촉은 될 것이다〉(최종천, ‘십오 촉’ 중)

그렇다면 쨍하니 시린 겨울 하늘 아래 꽃등처럼 걸린 이 곶감의 촉수는 얼마일까. 남원 인월장 김장환(67)씨는 마천에서 감 400 그루 농사를 지어 겨울이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넘나들며 함양장 운봉장 산청장 인월장 네 장에 곶감을 내어 걸고 있다.

 

▲ “추버야 지 몸에서 허옇게 분이 나는 기라. 얼매나 이삡니까.” 시린 겨울 하늘 아래 꽃등처럼 내건 곶감과 ‘무서리 세 번’을 맞고 온 시래기. 인월장 김장환씨의 ‘작품’이다. 눈 밝은 김서임 할매가 이 작품을 구입하셨다.

 

“곶감은 겨울 장사라예. 곶감은 추버야 됩니다. 이리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당도가 높아지고 더 잘긋잘긋해지는 기라. 추버야 지 몸에서 허옇게 분이 나는 기라. 가마이 보소. 얼매나 이삡니까.”

장에 내건 물견들이 자식처럼 어여쁘다는 김장환 아재.

“이 시래기 보소. 키도 크고 포름하니 색도 좋고 처억 봐도 차암 좋다 아입니까. 보기만 존 게 아니고 맛도 참 좋아예. 우리 시래기는 밭에서 무서리 세 번은 맞추고 캐서 말린거라예.”

‘반드시 무서리 세 번’을 견뎌야 그 맛이 보드랍게 되는 것이라는 ‘작품 설명’.

장터에는 그 자태 알아보는 고수가 있기 마련. 김서임(88) 할매가 무려 열여섯 묶음을 사겠노라고 값을 치른다.

“두고 먹고 나눠 먹고. 너물도 하고 국도 낄이고. 봄에도 꽷가리 좀 넣고 조물조물해서 참지름 쳐서 볶아노문 되아지 고기보담 맛나. 괴기 묵을래 시래기 묵을래 하문 우리는 괴기 안 묵지, 시래기 묵지.”

 

▲ 장터에서 제 주인과 함께 맵찬 바람과 추위를 견디고 있는 것들. 신대 달고기 감태 갯장어 홍합 조기

 

겨울의 복판에서 봄까지 두고 먹을 든든한 찬거리를 득템한 할매의 얼굴엔 웃음꽃이 환하다.

무안장 어물전 감태 다라이 위로 허연 김이 폴폴 날린다.

뜨끈한 물을 방방하게 담은 비닐봉지를 꽁꽁 언 감태 위에 얹어 두었다. 어떻게든 녹여 보려는 비상대책이다.

“오늘이 최고 추와. 감태가 다 얼었그만.”

인호어매(77)한테 강추위란 한강물도 어는 날씨가 아니라 ‘감태도 어는 날씨’.

“잠꽌이여. 또 그새 봄이 돌아와.”장터 어매들이 노상 기대어 사는 ‘도란장’의 희망은 오늘 같은 추위에는 ‘도라오는 봄’의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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