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 당신은 누구의 언어로 말하고 있나요?
미투운동, 당신은 누구의 언어로 말하고 있나요?
  • 가톨릭일꾼 진수미
  • 승인 2018.03.1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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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진수미 칼럼

미투 운동의 열풍이 거세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문화예술계와 정치권 유력인사들이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한국 사회는 자고나면 새롭게 접하게 되는 사건에 경악과 분노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투 운동이 정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임을 부정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처하는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진영 논리를 통해 지지의 논거를 발견, 정쟁 도구로 삼으려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어떤 로펌은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는지 ‘성범죄 전담’ 간판을 내걸고 무죄 받는 법을 의뢰인에게 친절하게 상담해 준다. 또 일부 남성은 여성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이른바 ‘펜스 룰’을 생존을 위한 대처법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펜스 룰’은 2002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언급한, ‘아내 외의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뜻한다. 이러한 논리는 여성을 사회에서 배제시킬 수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미투 운동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남성만의 리그’를 공고히 하는 데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자신을 부정하라 말하는 사회

소수자로서 여성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남성화 될 것을 요구받아 왔다. 영화 <노스 컨츄리>(2005, 니키 카로)에서 여성 광부들은 여성 혐오적인 농담에 마치 여성이 아닌 것처럼 의연하게 대처해야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여성이지만 여성으로 행동하지 말 것. 이른바 ‘패싱(passing)’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패싱은, “개인, 단체나 국가 간 따위에서 ‘열외(列外)’ 취급을 당하는 경우를 빗대어 이르는 말”로 수용되고 있지만, 인종학, 장애학처럼 소수자 정체성을 다루는 학문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인다. 패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닌 다른 집단의 일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장애를 감추어야 하는 상황이나 흑백 혼혈인이 백인만 출입할 수 있는 장소에 출입하기 위해 백인인 척하는 것을 말한다.

넬라 라슨의 소설 <패싱>(1929)은 인종의 패싱을 다루고 있다. 흑인 부르주아 출신으로 패싱이 가능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린은, 어릴 적 친구 클레어를 백인 전용 최고급 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다. 태연하게 차를 마시던 아이린은 자신을 응시하는 클레어의 집요한 시선에 심장이 죄어드는 느낌을 받는다. “저 여자가 내가 흑인인 것을 알아챌 수 없을 텐데…….” 소설은 패싱의 자기 배신적 상황과 불안감을 뛰어난 필치로 묘사한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겨 옛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워진 클레어는 매혹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미인으로 성장, 흑인 혈통을 감추고 부유한 백인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아이린 주변에도 백인과 결혼한 흑인들이 있지만, 문제는 클레어 남편이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 그는 아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성향의 사람이다. 클레어 남편은 아내 친구가 흑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아이린 앞에서 차별적 발언을 쏟아낸다. “그것(흑인)들은 나를 오싹하게 해요. 소름 끼치는 검은 악마들……” 이 장면은 흑인이 패싱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백인 중심적 사회에서 악마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흑인은 자신의 핏줄을 부정해야 한다. 클레어도 사회적 생존을 위해 위태롭고 기만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다.
 

차별과 모욕으로 점철된 일상

<히든 피겨스>(2016, 데오도르 엘피)는 1960년대 초 미소 간 극렬했던 우주개발 경쟁을 그린 실화 영화이다. 미국의 유인 우주선 발사 성공에는 비정규직으로 나사(NASA)에 근무, 인간 컴퓨터 역할을 했던 흑인 전산원 여성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영화는 이들을 인종적 패싱의 주체로 그리지 않는다. 그 결과, 여성이 드물고 흑인은 더 드물었던 과학계에서 이 인물들은 이중구속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차별과 모욕으로 점철된 일상을 감당해야 했다.

랭글리 연구센터가 있던 버지니아는 인종차별이 남아있는 주(洲)로, 도서관, 학교에 예외 없이 ‘colored(흑인용)’ 딱지가 있었다. 흑인이 변화하는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최신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면 모욕을 감수하고 백인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컴퓨터 상용화가 임박한 시기, 전산원 흑인 여성들은 실직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법과 제도는 흑인에게 조용히 도태되든지 소란스러운 모욕을 감수하든지 양자택일을 명령하고 있었다.

컴퓨터보다 정확한 계산능력으로 NASA의, 비정규이지만 핵심 인력이 된 캐서린(타라지 핸슨 분)은 촌각을 다투는 업무 와중에도 다른 건물에 있는 흑인용 화장실에 가기 위해 800미터를 뒤뚱거리며 달려야 했다. 그녀가 사무실에 비치된 커피를 무심코 따라 마시자, 동료들은 바이러스에라도 옮은 듯 인상을 찌푸렸고, 이후 그녀는 흑인용 커피포트가 별도로 놓인 것을 발견한다.
 

세계의 부정의, 그 너머의 정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있다. 소수자이자 타자로서 여성이 느끼는 사회도 그렇다. 여성성을 드러내면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고, 감추면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게 된다. 물론 우리 모두는 공적 공간에서 완전한 자기로 살아가는 순간이 많지 않으며, 얼마간은 패싱을 하며 살아간다.

넬리 라슨은 패싱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패싱에 관해서는 정말 알 수 없어요.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용서해요. 우리는 그것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찬미해요. 우리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며 그것을 피하면서도 보호해요.” 이 양가감정! 부동의/경멸/혐오와 기피, 그리고 용서/찬미/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라니. 패싱이 야기하는 혼란스러움은 미투 운동을 통해 세계의 부정의와 그 너머의 정의를 마주하는 오늘날, 우리 내면을 대변하는 것 같다.

우리는 타자의 경험과 실존을 타자의 입장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가 서있는 지반의 경사와 그로 인한 현기증을 타자와 동시에 체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에서 정의의 조건을 찾는다. 그에게 신은 타자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봉헌하라고 요구하는 신의 말처럼 타자의 언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언어를 배반할 것을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가족-이웃-세계의 윤리적 관계를 희생하고, 그 너머에 있는 신(타자)의 언어에 응답했다.

며칠 전 TV는 미투 운동의 여파로 잠적했다가 법정에 자진 출두하는 한 정치인의 모습을 방영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보다 자진출두의 의연함(?)이 서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관심법을 터득한 궁예가 아닌 다음에야 그 심중을 꿰뚫을 수 있겠냐마는, 오히려 잠적 직전 페이스 북에 그가 올렸던 고뇌와 혼란에 휩싸인 언어에서 정의의 빛이 일순 스쳤던 것도 같다. “누가 감히 고뇌를 생략한 채 정의롭게 되고자 할 수 있겠는가?”(데리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피해자를 제외한 국민과 가족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에게서 미래를 보았던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는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언어로 나를 전달하고 있는가. 그것은 ‘타자’의 언어인가, ‘나’의 언어인가. 과연, 현재 나는 정의로운가.”

<진수미 님은 글쟁이이며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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