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왕권보다 신념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던 인물 : 1 / 이석원

▲ 여왕의 성이라는 뜻을 지닌 드로트닝 궁전은 크리스티나 여왕도 사랑하던 거처였고, 현재 국왕 칼 16세 구스타브와 왕비 실비아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스톡홀름에서 가장 젊고 매력이 물씬 나는 곳은 드로트닝 거리(Drottninggatan)다. 스톡홀름 시립도서관 뒷동산인 옵세르바토리에 숲(Observatorielunden) 남쪽 골목에서 시작해 국회의사당으로 건너가는 릭스 다리(Riksbron)까지 남쪽으로 약 1.5km 곧게 뻗어있는 길이다. 이 길 양옆으로는 카페며 레스토랑, 그리고 펍들이 즐비하고, 젊은이들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세리엘 광장(Sergel torg)도 지나간다.

스톡홀름에서 살면서 이 길을 걷는 것은 일상의 즐거움이 있다. 특별한 것은 아니다. ‘사람 구경하기 쉽지 않다’는 스웨덴에서의 삶에서 그래도 이 곳은 늘 사람으로 북적댄다. 한여름 여행 시즌이면 서울의 명동이나 별 다를 바 없을 지경이다. 을씨년스러운 겨울이라도 이 길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이 길을 좋아하는 것은 비단 한 두 사람 뿐 아니라든 것이다.

그럼 스웨덴 사람들은 왜 유독 이 길을 좋아할까? 단지 즐비한 상업 시설 때문에? 사람들이 워낙 좋아하는 길이기에 그런 것들이 즐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왜?

이 길의 주인이 있다. 스웨덴의 첫 여왕인 크리스티나 여왕(Drottning Kristina)이다. 스웨덴어로 왕은 Kung이고 여왕은 Drottning이다. 그래서 이 길의 이름이 ‘여왕의 길’이라는 뜻인데 크리스티나 여왕을 지칭한 것이다. 이 길이 처음 건설된 것이 1636년. 크리스티나가 왕위에 있을 때다. 당시에는 스톡홀름의 가장 중심 도로였던 이 길이 건설되고 3년 후 이 거리 이름은 여왕의 길, 즉 드로트닝가탄으로 명명된다.

크리스티나는 아직도 스웨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존재다. 스웨덴에서 여왕은 크리스티나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재위 1718∼1720)이 있기는 했지만, 짧은 재위 기간에 역사적으로 존재감이 없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아직까지 여왕이 없다보니 스웨덴 시민들에게 ‘여왕’이란 크리스티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Drottning이라는 단어는 여왕 뿐 아니라 왕비에게도 쓰인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여왕’은 왕의 부인이 아닌 스스로가 왕인 여성을 뜻하는 게 일반적이다.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때 스웨덴은 역사상 가장 강력했다.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을 감쌌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의 최강국이었다. 그래서 스웨덴 역사에서는 ‘대왕(Stor Kung)’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왕이다.

 

▲ 스웨덴 최초의 여왕이자 스웨덴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유일한 여왕. 당대 유럽 최고의 미모로 꼽혔고, 학식과 문화 예술에 대한 애정이 깊었을 뿐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가톨릭을 따르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28살의 나이에 왕위를 아낌없이 내려놓기도 해 ‘신념의 여왕’으로 사랑받는다.

 

크리스티나는 아돌프 왕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그래서 여자가 왕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아돌프 왕은 크리스티나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했다. 1632년 아돌프 왕이 30년 전쟁 중 합스부르크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크리스티나는 불과 6살의 나이에 스웨덴의 첫 여왕이 됐다. 그리고 12년의 섭정 기간 동안 확실한 왕재로 성장했고, 성인이 되자마자 직접 스웨덴을 통치하는 ‘진짜 왕’이 됐다.

크리스티나는 1648년 30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스웨덴 시민들을 전쟁의 고통에서 해방시켰다. 아버지에 이어 스웨덴을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으로 유지시키면서도 문화도 발전시킨다. 스웨덴 최초의 신문을 만드는가 하면, 여러 대학도 설립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지에서 1000여점에 이르는 미술품을 사들였다.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소문난 학구파다. 유럽 각국의 대단한 석학들을 스웨덴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서양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지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크리스티나의 초빙으로 스웨덴에 와 그의 스승이 됐다. 데카르트는 54세에 스웨덴에서 사망했는데, 크리스티나의 학구열이 너무 강해 데카르트가 과로와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스웨덴 시민들이 크리스티나를 사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신념을 위해 왕위를 내던진 신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신교인 루터교가 국교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루터교가 아닌 구교인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루터교의 나라 스웨덴의 국왕으로는 문제가 됐다. 스웨덴의 귀족들과 시민들도 이를 걱정했다. 크리스티나는 모든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종교적 신념이 다른 것은 간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크리스티나 스스로가 그 갈등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왕위가 아닌 종교적 신념을 선택한 것이다. 왕위를 자신의 고종사촌인 칼 구스타브에게 물려준다. 칼 구스타브는 30년 전쟁의 전선에서 스웨덴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크리스티나가 생각했을 때 그는 스웨덴의 새로운 국왕으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칼 10세 구스타브 왕이다.

 

▲ 여왕의 길이라는 뜻의 드로트닝가탄은 스톡홀름에서도 가장 번화하고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 크리스티나 여왕 시대에 건설됐고, 그래서 여왕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8살, 선위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이른바 ‘성군’이었다. 재위 10년 째, 모든 귀족과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때다. 하지만 나라가 선택한 종교와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왕위를 고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웨덴을 떠나 로마로 가 남은 일생을 로마 교황의 곁에서 유럽의 가톨릭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다. 그래서 크리스티나의 무덤은 스웨덴이 아닌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다.

어떻게 보면 스웨덴 사람들에게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종교적 고집 때문에 국가와 사랑하는 시민들을 버린 왕일 수도 있다. 로마로 간 후 칼 10세 구스타브 왕의 장례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조국을 찾지 않은 비정한 여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웨덴 사람들이 생각하는 크리스티나는 ‘조국을 버린 여왕’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왕의 권력을 내준 여왕’이다. 자신의 신념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 때문에 조국이 종교적 갈등을 겪지도 않게 한, 멋지고 아름다운 여왕이었다. 그래서 스웨덴은 아직도 그 ‘여왕’을 늘 사랑하고 기리는 것이다.

스웨덴에는 또 다른 신념의 왕이 있다. 현재 국왕인 칼 16세 구스타브 국왕이다. 다음 주에는 그의 이야기를 다뤄본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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