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일본에 가다> 2회 / 김혜영

3학년 마지막 학기다. 휴학을 하지 않은 동기들은 4학년이 됐고, 벌써부터 취업 잔소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항상 꿈과 목표를 간직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어필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늘 낙관적이고 대책이 없다는 평가만 내렸다. 한두 번이면 무시하겠지만, 여러 번 반복될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잠깐 현실에서 떠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장 싼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다. 일본의 기타큐슈였다. 언니에게 별 기대 없이 같이 가자고 물었더니, 언니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가자고 답했다. 언니는 취업준비생이라, 그동안 어디에 가자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단번에 대답하는 것을 보며 어딘가 씁쓸해졌다. 늘 강하던 언니도 지치고 힘들었구나. 그래서 따뜻한 온천이 도처에 있는 일본으로 떠났다. 그 두 번째 이야기다.

 

 

처음 일본 여행을 계획했을 때, 시모노세키(しものせきし)라는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욕설처럼 사용하는 장난을 자주 쳤는데, 그 덕에 지명을 확실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조약과 관련된 지역이라는 것 말고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아쉬웠다. 왜 조약에 지명이 붙었는지, 당시 시모노세키는 어떤 곳이었는지 말이다. 이번 기회로 시모노세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시모노세키에 위치한 쵸후(長府) 성하마을(城下町)을 찾게 되었다.

시모노세키는 예부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데에 통로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화려한 역사를 간직한 ‘지방’ 지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교통이 편리하고 굵직한 산업과 유적들이 남았지만, 일본의 중심지에서는 멀어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해지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여러 산업들이 쇠퇴하면서, 지방 지역은 관광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모노세키의 첫 인상은 활기찬 기운이 별로 없는 지역이었다. 특히 쵸후 성하마을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한적한 동네였다. 2,3층이 전부인 비슷하게 생긴 옛집들 사이로 이끼가 낀 수로가 있고, 마을 구석에 자리한 신사는 화려함 없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겨 친숙하기도 했지만, 일본 고유의 색채가 드러나 낯선 신비감도 함께 느껴졌다. 우리나라는 한옥 마을을 제외하고 낮은 건물의 집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한 마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로는 역사 시간에 사진으로만 봤던 건축물이었다. 비가 오면 기와 끝에 모인 빗물이 돌로 된 수로로 떨어지고, 온 집을 돌아 하천으로 모이는 모습이 절로 그러져서 신기했다. 그러니까 시모노세키와 쵸후 성하마을은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자연과 고요한 아침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잠시 스쳐지나갔던 신사로 다시 향했다. 유명한 신사는 초록 나무 사이에 주황색 건물인 형태라 눈에 곧잘 띄었는데, 쵸후 성하마을의 신사는 이끼가 낀 수로처럼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곳곳에 큰 나무가 자리해서 신사의 풍경을 한 눈에 담을 수도 없었다. 진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는데, 조금 더 들어가니 주민들 몇몇이 모여 경건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제했기 때문에 ‘신사’라는 두 글자에 부정적인 감정이 앞서곤 한다. 그러나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 기도의 풍경을 바라보면, 그것만큼 일본의 평화로운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매체가 없다. 신사에 새겨진 오랜 시간과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은 일본 특유의 분위기와 정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 2,30대 층 사이에 일본 여행이 유행하며 이를 비난하는 시각이 등장했다. 전범이나 우익인 기업의 물건은 불매하면서 왜 여행을 가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피해자가 존재하는 역사는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하지만, 그 역사와 문화 자체를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진정한 정의는 사과와 재발 방지에 있으며, 이는 이해와 인정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일 테다. 그런 점에서 일본과 한국의 교류가 증가하고 관광객이 늘어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 사실 여행 내내 밥을 해먹지 않고 식당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친절했던 일본인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스쳐지나갔다. 일본에 대한 욕을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 같은 한일관계와 국민적 정서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쵸후 성하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모리 저택을 찾았다.

 

▲ (모리 동상)

 

모리 저택은 1900년대에 시모노세키를 다스린 영주인 ‘쵸후 모리(長府毛利)’와 그 집안의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마을 이름인 ‘쵸후 성하마을’도 ‘쵸후 모리’의 성 아래 마을이라는 뜻이며, 저택은 현재 관광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택과 정원, 그리고 마을의 전체적인 풍경은 우리나라의 덕수궁 돌담길이나 북촌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장소인데, 이상하게도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기타큐슈시와 시모노세키현 자체가 청년층보다 노년층이 많은 지역이기도 하지만, 첫날 방문한 고쿠라 성이나 모지코라는 항구 마을은 일본과 한국 관광객을 모두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두 관광지 모두 청년층에게 ‘핫 플레이스’로 불리는 곳이기에, SNS 입맛에 맞지 않는 역사적인 장소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잊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모리 저택은 관광객이 적은데다 크고 오래된 저택이다 보니 난방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무로 지어져서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어딘가 무섭기도 했지만, 방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대가족이 함께 생활할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 방에는 따뜻한 녹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삼촌이 있고 저 방에는 아이들이 뛰어놀 것 같은 풍경 말이다.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살펴보다 다락방이 하나 나왔는데, 올라가니 가문의 족보와 여러 설명이 있었다. 일본어로만 되어 있어 모든 글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모리 가문이 유명했고 권력과 재물이 많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 ‘알쓸신잡’(tvN)에서 오래된 저택이 훼손되지 않은 가문은 그 사람들이 선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된 저택은 피지배 계급에 있던 사람들이나 앙심을 품은 이가 난리 중에 불을 지르거나 훼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대로 보존된 것은 저택 사람들의 평판이 좋고 이웃과 잘 지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단정할 수 없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오랜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집을 보면서 괜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누군가는 덜 가진 상태에서 이뤄낸 평화가 진정한 평등과 평화는 아니겠지만, 이 집과 마을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무료로 제공된 기모노를 입고 저택과 정원을 거닐며, 일본의 문화를 체험하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에 히로시마 이정표를 보게 되었다. 많이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서울에서 부산 가는 길의 표지판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세워져 있는 듯했다. 오랜만에 본 낯설고도 친숙한 지명이기에 “와 여기 히로시마 이정표가 있어!”라고 외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언니가 담담하게 자신이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언니가 일본에 간 적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히로시마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언니는 고등학생 때 YMCA 단체에서 활동하며 히로시마에서 열린 한․일 학생 문화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원폭 돔)에 가서 원자폭탄이 마을에 끼친 영향을 두 눈으로 확인했는데, 처음엔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흉측스러운 건물을 그대로 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한다. 건물을 볼 때마다 힘들고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모든 일본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담담하게 전쟁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엔 평화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했다. 마을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인데, 그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곳곳에 추모비도 많았는데 조선인 원폭 추모비도 있었고, 평화기념공원에는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아이들이 그린 작품도 전시되고 있었다.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북대학교에서 느낀 공간의 정치와 보존의 중요성이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현대에 일어난 역사적 장소들의 보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상적으로는 판자촌을 제외하면 산이나 언덕 형태를 유지한 채 집을 짓는 경우도 거의 없다. 시모노세키시는 요즘처럼 환경 담론이 발달하기 전에 이미 건설이 된 도시인데, 환경을 보존하며 건축을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나무와 어우러진 신사나 모리 저택, 히로시마의 원폭 돔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도 역사를 기억하고 현재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공간, 혹은 자연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는 태도를 조금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역사를 소중히 할 때, 역사 속 피해자적 사건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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