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진수미 칼럼

봄은 사자처럼 왔다가 순한 양처럼 간다는 말이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삼월 중하순, 전국 곳곳에 눈이 내리고 강원 산간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 꽃샘추위가 몰고 온 사자 같은 바람을 뚫고 종로의 영화관에 다녀왔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보기 위해서였다.

관객이 떠난 어둠 속 여운에 젖어들며 화면을 가득 메운 OST 목록을 확인했다. 영화관을 빠져나올 때 비를 맞고 걸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전해준 촉촉한 감성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간만에 맛보는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서걱거리는 바람 속 부유물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이물감에 아쉬움을 느끼며 전철역으로 향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물의 이미지를 만끽할 수 있는 영화다. 부제가 알려주는 것처럼 영화에서 물은 사랑 이미지와 상통한다. 물의 형태가 용기(容器)에 의해 결정되듯 사랑도 그것을 품은 존재에 따라 형태가 결정된다. 영화는 들을 수 있지만 말 못하는 일라이자(샐리 호킨스 분)와 괴생명체(더그 존스 분) 간의 독특한 사랑을 그린다. 그녀는 미국 항공우주 연구 센터의 청소부이며, 도시의 변두리 영화관 2층 낡은 집에 산다. 그녀 주위에는 수다스러워도 대화가 통하는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분)와 늙고 가난하지만 예술 충동을 여전히 간직한 이웃집 화가 자일스(리차즈 젠킨스 분)가 있다.

 

▲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기예르모 델 토로, 2017) 스틸컷

서구 제국주의 시선의 야만성

시간적 배경은 지구 위 식민영토가 모두 개발되었다고 여겨지던 1960년대, 서구 제국주의 시선이 우주와 해양 같은 미지 공간에 집중되던 때이다. 일라이자가 일하는 센터에 아마존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아가미와 비늘을 지닌 초록빛 형상의 괴생명체가 실려 온다. 남미 인디언은 이를 신으로 받들어 모셨다고 하지만 서구 제국주의자의 눈에는 괴물로 비춰질 뿐이다. 이 대목에서 오래 전에 읽어 출처를 알 수 없는 글 한토막이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어 요약한 내용이다. 서구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왔을 때 그들은 인디언을 동물로 여기고 사냥했다. 인디언도 백인에 대한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번개를 내뿜는 총을 지닌 백인이 신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신을 불에 태우면 죽는지 사는지가 궁금했다. 비인간적인 행동을 똑같이 했지만, 타자를 동물로 여겼던 서구인과 신으로 여겼던 인디언 중 누가 더 문명적이고 누가 더 야만적인가!

우주 센터 실험실의 보완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분)는 타자를 괴물로 여기는 서구 남성을 표상한다. 그는 신이 인간, 특히 남성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했으므로 자신이 여성이나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의 이름이 서구 문명세계를 버리고 타히티로 떠났던 화가 고갱을 모델로 한 서머셋 모옴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과 같고, 이 인물의 대척점에 놓인 일라이자의 선한 이웃 자일즈가 화가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모옴의 스트릭랜드는 미학적 야망을 위해 타인을 잔인하게 짓밟고 배신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을 사랑했던 여성 블란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음에도 예술을 위한 작은 희생으로 간주하는 파렴치한 예술지상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의 스트릭랜드도 유사한 인물이다. 일라이자에 대한 성희롱을 서슴지 않고, 과학자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괴생명체를 해부, 우주 개발에 이용하려고 한다. 괴생명체와 교감을 나누었던 일라이자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그를 탈출시키고, 바다로 돌려보낼 계획 아래 자신의 집 욕조에 숨겨놓는다.

 

음악과, 물방울과 사랑의 눈망울

물과 사랑의 향연은 이제부터다. 일라이자는 생명체와 욕조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환희에 젖는다. 이전에도 물은 영화의 주요 모티프였지만 산뜻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물은 신비한 생명체를 산 채로 가두는 감옥이거나 그녀와 젤다 앞에서 스트릭랜드가 누는 소변, 일라이자의 피로와 외로움을 부각시키는 버스의 차창에 어리는 물기처럼 부정적 이미지에 가까웠다.

초록빛 생명체와 일라이자의 사랑을 확인한 후, 차창 물방울은 사랑의 결합을 노래하는 매개체가 된다. 투명하게 유리 위를 구르던 방울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것이다. 그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물방울을 응시하라. 풍성한 음악이 물방울과 그것을 황홀하게 응시하는 일라이자를 감싼다. ‘라 자바네즈(La Javanaise)’다. 마들린 페이루(Madeleine Peyroux)는 노래한다. “Nous nous aimons(우리는 서로 사랑해요)”.

그녀는 초록 생명체와 다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욕실로 간다. 이번에는 물을 가두는 욕조를 버리고, 더 풍성하게 더 자유롭게 사랑과 물을 만끽하고자 한다. 일라이자는 문을 닫고 욕실 가득 물을 채운다. 물로 출렁이는 방 가운데서 이들은 부둥켜안는다. 일라이자의 욕실 바로 밑, 영화관 천장에는 누수가 시작되고 영화를 보던 관객이 물벼락을 맞는다. 영화관 직원이 사태를 알아보려고 뛰어올라 왔다가 자일즈와 마주치고, 자일즈는 그녀의 집으로 간다.

욕실 바닥 문틈으로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욕실의 낡은 나무문에는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는데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과 물줄기의 아름다움을 카메라는 숨죽이고 응시한다. 보라. 사랑은 욕조의 둥근 나선형, 때로는 사각형. 그것은 감출 수 없는 것, 감추고 싶어도 새어나오는 것, 몰랐던 벽(문)에 난 구멍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 그 틈새는 사랑의 빛과 온기를 내뿜는 통로. 자일즈는 욕실에서 새어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을 열어젖힌다. 일라이자와 생명체를 감싸며 욕실을 채웠던 육면체 물들이 형체를 잃고 쏟아져 나온다. 일라이자는 사랑의 취기 어린 눈동자로 자일즈를 응시한다. 자일즈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화폭에 담는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출렁이는 사랑과 물의 시청각적 이미지만으로 존재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 아름다움은 낯설고 몽환적이고 영화적이다. 그러나 로맨스 장르에 대한 일반적 기대감으로, 혹은 젠더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실망할 가능성도 내포한 영화다.

 


불가해한 현실, 동화적 결말

기예르모 델 토로는 로맨스 영화 일반이 갖는, 스크린의 사랑에 관객이 동화되고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승리에 감복, 사랑을 찬양하는 결말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가 참조했다는 괴수영화 <해양괴물(Creature from Black Lagoon)>(1954, 잭 아놀드)에서 괴생명체가 물속(?)의 떡처럼 바라만 보다가 이루지 못했던 인간 여성과의 사랑을 성취시키는 것이 일차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비현실적이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일단은 아름답게, 미학적으로. 다음으로는 선악을 단호하게 심판하는 동화적 방식으로.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의 행방을 추적하고 일라이자가 저지른 일의 전모를 알아낸다. 이 과정에서 괴생명체가 물어서 절단, 접합수술을 받은 스트릭랜드의 손가락은 까맣게 괴사되고, 초록빛 손으로 쓰다듬었던 자일즈의 대머리는 치유된다.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가 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명료한 선악 대비는 너무 천진스러워 귀엽기까지 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름답고 천진난만한 동화의 이면에 불가해한 현실의 법이 작동한다는 것.

바슐라르는 깊은 물이 죽음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인간의 경계를 넘어 사랑을 추구한 일라이자는 괴생명체와 함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인어공주가 자신이 사랑했던 왕자를 해양 세계로 끝끝내 초대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괴생명체는 일라이자를 여정의 동반자로 선택한다. 스트릭랜드이 쏜 총알에 일라이자가 죽었고 그 연인이 자신의 세계에 그녀를 마지막으로 초대한다는 해석이 이 선택을 합리화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일라이자는 죽어야하는 것일까. 국가의 재산을 빼돌린 데 대한 서사적 처벌인가. 타자인 괴물을 지나치게 사랑해서인가. 욕망에 적극적인 여성이어서인가.

<셰이프 오브 워터>의 저편에 놓인 ‘인어공주’와 대조하며 서사를 곱씹어 보아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인어공주처럼 괴물은 말하지 못한다. 영화는 일라이자의 목소리까지 앗아갔다. 일라이자는 사랑을 노래할 때만 목소리를 얻는다. 왜 괴물은 성별이 그토록 뚜렷한가. 영화는 왜 괴물에게 탄탄한 남근을 선물해야 했던 걸까. 그래야 일라이자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 때문에 나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동의하기 어려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미세먼지가 떠다니는 최악의 봄 공기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럼에도 봄은 짙어지고 양처럼 순해지고 꽃들이 만발할 것이다. 우리는 나무의 성별을 묻지도 따지지 않고 그들이 피워낸 꽃송이들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흐르는 물이 성별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진수미 님은 글쟁이이며 ‘더불어 잘사는 세상’ 연구자입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