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여백

누군가의 들꽃이 된다면…

<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 - 2회: <마음의 고향> 강진수 기자lrkdwlstn96@naver.coml승인2018.03.30 14:01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영화소개 : <마음의 고향>, 1949년 작, 감독: 윤용규, 출연: 최은희, 변기종, 유민, 김선영, 석금성, 남승민 등

 

▲ 영화 <마음의 고향> DVD 표지

누군가의 들꽃이 되고 싶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진 모티브는 사실 부채도 염주도 아니었다. 가장 보잘 것 없고 또 한편으로는 가장 귀중하기도 한 무엇. 우리는 들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성이가 가장 정성스레 모으고 서울아씨도 늘 방 한가운데에 꽂아두던 들꽃. 그들은 들꽃을 꺾으러 다니며 서로의 연을 맺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어미가 없는 환경 속에서 그들을 엮어준 모티브가 곧 들꽃이 된다. 이처럼 자유로운 들꽃이 어디 있는가. 이처럼 자유롭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들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누군가의 들꽃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성이의 어머니가 되고 싶은 사람과 어머니인 사람. 그리고 도성이를 길러주고 함께 생활하는 스님들과 아저씨. 그들은 다들 도성이를 사랑하고 있다. 제각기의 방법으로. 그들이 들꽃처럼 피어나 도성이를 마주하는 것만 같다. 그들은 도성이의 들꽃이다.

“이에 비하면 작품의 수와 관심도에 있어서 상대적인 약세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가족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예술작품의 경우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 ‘열정, 일탈, 초월, 젊음’ 등을 낭만적인 사적 정조로 취급하는 경향이 짙다면, ‘가족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공적이고 사회적이다. ‘가족’은 예술가에게 있어 상상력의 원천으로, 추방당한 자의 유토피아로, 또는 사회와 국가의 환유로 작용해 왔다.” - 『한국영화와 가족 담론 : 1960년대와 2000년대를 중심으로』 중에서, 박명진

이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보기에 ‘마음의 고향’이라는 작품은 도성이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성장 영화로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은 분명 가족 영화이다. 들꽃처럼 엮어져 있는 관계들은 모두 도성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인다. 그들은 가족처럼, 이 아니라 정말 가족이 되어 도성이와 함께 한다. 그 누가 도성이에게 소중하지 않은 인연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이 영화를 가족 영화의 시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도성이만이 주인공이 아니라, 도성이에게 가족이 되어준 모든 들꽃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도성이에게 가족이란 인용된 바와 같이 유토피아 그 자체다. 스님들도 서울 아씨도, 어머니 노릇을 하지 못한 어머니조차도 도성이에게 갖춰지지 못한 유토피아를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유토피아를 만들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스님과 아저씨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서울 아씨는 큰 스님을 설득하려 하며, 도성이의 진짜 어머니는 도성이를 포기하려 한다.

도성이에게 정말 마음의 고향은 어디였느냐고 묻는다면 도성이는 결코 어머니뿐이라고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긴 하다. 비둘기의 깃을 뽑아 부채를 만들려고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큰 스님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온갖 고생을 하며 비둘기를 잡는다. 그러나 서울 아씨가 도성이를 데리고 가기로 한 다음의 도성이를 보라. 도성이는 대웅전 뒤에 숨겨 놓은 죽은 비둘기도 잊어먹어 가면서 서울로 가겠다고 들떠 있지 않았던가. 도성이라는 작은 아이에게 어머니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지만 그렇게 뚜렷한 무언가는 아니다. 기억 속에도 없는 존재를 어떻게 어린 도성이가 분명히 마음에 담아둘 수 있을까. 서울 아씨가 어머니가 된다면 그녀를 어머니의 자리에 둘 것이 어린 도성이의 마음이다. 궁극적으로 도성이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유토피아지, 어머니 그 자체가 아니다. 자신을 평범하게 길러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 어떤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도성이가 바라는 전부다.

서울 아씨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스님과 아저씨의 거짓말이 도성이에게 유토피아가 되었다.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해서 실체가 전혀 없었지만, 적어도 그 거짓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도성이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님과 아저씨도 도성이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어찌되었든 간에 도성이는 가족이 필요하고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스님과 아저씨, 주지 스님도 도성이에게 미련이 있다. 아이를 더 잘 돌보고 키우지 못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그럼에도 아이의 어머니에게 다시 아이를 돌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서울 아씨가 도성이를 더 잘 키워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작 비둘기를 죽였다는 이유로 도성이의 마음을 헤아릴 기회도 없이 무작정 서울행을 막는다. 그것도 제 어머니를 위한 부채를 만들겠다는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그토록 모질게 외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주지 스님 역시 도성이를 사랑하는 가족이다. 도성이가 모든 들꽃의 이름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주지 스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도성이의 들꽃이다. 그리고 도성이의 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헤아리고 치유해주기에는 너무나도 성격이 뭉툭한 그이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기른 도성이에게 그가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성이를 중심으로 도성이의 가족들이 포진하고 있다. 꼭 들판에 서로 뿌리를 엮어 자라는 들꽃들처럼, 도성이를 중심으로 들꽃이 한가득 피어있다. 그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르다. 들꽃의 모양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제각기 다른 땅, 다른 뿌리를 뻗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주지 스님과 서울 아씨는 같은 행색, 같은 성격으로 도성이를 대할 수는 없지만 둘 다 도성이를 사랑하고 있다. 도성이가 편하게 자랄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들도 가족으로서 꿈꾸고 바란다. 그런 서로의 꿈들이 오히려 도성이의 유토피아를 망치고 만다. 오히려 아저씨의 거짓말이 도성이를 들뜨게 하지 않았더라면, 서울 아씨의 아름다운 기색이 도성이의 혼을 쏙 빼어놓지 않았더라면, 주지스님의 결정이 도성이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도성이의 진짜 어머니가 차라리 도성이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도성이는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가족의 유토피아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가족 구성원이 꾸려나가는 ‘가정’은 작은 사회로 이해되었고, 작가들은 이 사회의 축소판을 통해 사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비유적으로 표현해 냈다. 따라서 일상 속에 묻힌 현대인의 시각에서 회고취미로 접근하는 가족 내러티브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가족 이야기는 당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작가의 간접적 발언으로 읽힐 만 하다.” - 『한국영화와 가족 담론 : 1960년대와 2000년대를 중심으로』 중에서, 박명진

이것은 결국 도성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들꽃으로 얽히고설킨 사람들이 결국엔 도성이에게 상처만을 남겨주고 만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서있는 것만이 따뜻할 줄 알았는데 도성이는 어느 순간 성장해버리고, 혼자 서는 법을 배워버렸다. 가족들은 혼자 서는 법을 알아버린 어린 아가에게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아이에겐 가족들이 전부일 줄 알았는데, 가족적 유토피아 역시도 순간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도성이가 절을 떠나는 장면은 사회에 던지는 영화의 가장 큰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들꽃은 모이면 아름답고 질기지만, 낱낱이 흩어지는 순간 아무런 아름다움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낱낱이 가족들을 살펴보면 반드시 의지해야할 그 누구는 없다. 결국엔 홀로 서서 꽃을 피울 줄 알아야, 누군가는 아, 이게 무슨 꽃이지, 라며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 도성이는 그 꽃을 피우려 절을 떠나 사회로 나가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 무작정 무섭고 두려운 일에 처할 것이라고 우리는 걱정하지만, 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들꽃의 한 가운데에서 진달래를 피울 수도 있고 민들레, 장미, 수도 없이 많은 꽃들을 피워낼 수도 있다.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영역이다. 온전히 도성이에게 달린 것이다.

영화 속에서 도성이가 보여준 모습을 토대로라면 도성이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마음속에 들꽃을 묻었으니 도성이는 더 넓고 더 자신을 잘 이해해줄 가족적 유토피아를 찾아 헤맬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들꽃들 사이에서 자신의 꽃잎을 피워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도성이도 또 자식이나 가족 그 누군가에게 들꽃이 되어줄 것이다. 땅을 헤집고 다니는 이름모를 들꽃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며 걱정 말고 꽃을 피우라고 응원해줄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 속 들꽃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사회에는 수많은 부딪침과 기회, 역경, 행복이 잠들어 있다. 누구든 도성이의 마음에 들꽃이 된다면.

내 마음의 들꽃이 된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용기를 얻고 나 역시 들꽃이 될 것이다. 힘 있는 뿌리로 서로와 서로를 엮고 밝게 봉오리를 틔우며 나아갈 것이다. <대학생>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뉴텍미디어그룹  |  등록번호 : 서울다07108  |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발행인 겸 편집인 : 정서룡  |  발행소 : 서울시 종로구 난계로 29길 27(숭인동) 동광 B/D 2층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광고국장 : 황석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Copyright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  master@weekly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