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떻게 부활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부활한단 말인가?
  • 가톨릭일꾼 유대칠
  • 승인 2018.04.0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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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유대칠 칼럼

부활이란 죽어야 한다. 부활이란 죽은 자 가운데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러면 묻는다. 이 몸을 가지고 다시 부활할 것인가? 이미 죽었지만 다시 지금 이 몸을 가지고 부활하여 지금과 같이 먹고 마시고 할 것인가 묻는다. 어찌 보면 생물학적인 죽음을 부정하는 어떤 부활을 묻는다. 쉽지 않다.

과연 어떤 몸으로 다시 부활한단 말인가? 병을 가져 힘든 몸으로 평생을 산 이는 그 힘든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인가? 아이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어른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죽기 전 노인의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몸으로 부활하면 생물학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는 물리적 존재로 다시 부활함인데, 그렇게 부활하여도 다시 병에 걸리고 싸우고 다투다 다시 죽지는 않을까? 다시 더 좋은 것을 탐하며 서로 싸우고 다투다 다시 죽지는 않을까? 그러면 다시 부활을 위해 기도하고 애써야 할까?

몸을 가지고 다시 부활할 것인가? 설사 그리 부활한다 해도 참 쉽지 않다. 몸은 남보다 더 화려한 옷을 걸치고 싶고 더 좋은 것을 먹고 싶고 더 큰 집에 더 편하게 살고 싶어 할 것인데, 몸은 그 욕심을 우리에게 일으키기 좋을 텐데 말이다.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하여 합리적인 어떤 설명을 할 힘이 나에겐 없다. 잘 모르겠다. 정말이다. 어찌 합리적으로 이를 설명할 것인지 말이다.

 

▲ cristo sentado en la cruz - Buscar con

 

죽음이 먼저다

그런데 말이다. 적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부활이란 죽어야 한다. 죽음이 먼저다. 죽은 이 가운데 다시 살아나기 위해선 우선 죽어야 한다. 매일 걷는 길에서 마주하는 산의 나무들은 죽은 것의 힘으로 산다. 걸으면 내 발 아래 썩어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사그라지는 나무들이 있다. 묻히고 깨지고 어느 순간 과연 한때 큰 나무였나 생각이 들 정도로 부서져 버린다. 그리고 흙인지 나무였는지 모른 지경에 이른다. 그 단단하던 친구들은 부드러운 거름이 되어 버린다. 어찌 보면 죽어 썩어 버린다. 더 이상 아무 희망도 없는 먼지가 되어 버린 것일지 모른다. 다신 그때 그 나무의 모습으로 다시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그 몸은 다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잘 보면 참 신기하다. 봄의 기운을 타고 그 죽어 사라진 먼지와 흙을 머금고 새싹이 자라고 산의 나무들은 더욱 더 푸른색의 잎을 보인다. 그 몸은 죽어 사라졌지만, 또 다른 풍성함의 힘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죽어 다시 그 몸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힘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다음 혹은 함께 산 벗의 생명을 위한 새로운 희망으로 부활한 셈이다.

하나의 생명은 그 눈에 보이는 몸은 비록 달리 되었지만, 먼지가 되고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버렸지만, 그 생명력은 죽지 않았다. 모든 아집에서 벗어나 주변 모든 존재에게 자기의 모두를 내어주었다. 어찌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이 하나의 몸에서 자유로워진 생명이 또 다른 몸으로 혹은 또 다른 그 무엇으로 다시 그 존재를 드러내는 시작이다. 이리 생각하면 죽음은 모든 생명의 근거이다. 또 다른 어느 생명의 희망이다. 자연계처럼 우리네 인간의 세상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른 이들을 위해 죽은 몸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그냥 죽어간 것이 아니라, 함께 한 벗 혹은 새로운 다음을 위한 거름으로 먼지와 흙으로 죽어갔다. 어떤 아집도 없이 철저히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놓았다. 일제 강점기와 독재의 칼날 앞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놓은 많은 이들을 생각해보자. 자기 한 사람의 몸이 아닌 더 큰 ‘나’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놓은 많은 이들을 생각해보자. 비록 그 몸은 죽어 사라졌지만, 그 치열한 외침의 생명력은 지금 우리네 자유의 거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

어쩌면 그들은 한 개인으로 살다 한 개인으로 죽었지만, 우리의 희망으로 부활한 것은 아닐까? 지독한 고통으로 우리의 희망을 품은 것은 아닐까? 굳이 생물학적 죽음이 아닐지라도 ‘나’ 하나의 욕심을 죽이고 ‘우리’의 미소로 부활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보자. 같은 종교도 같은 나라도 아닌 남을 위해 사는 이들을 보자. 길거리 노숙자들의 아픔을 안아주는 이들의 그 따스한 애씀을 보자. 자기 몸이 원하는 달콤한 것과 더 화려하고 좋은 것을 뒤로 하고, 남의 아픔 앞에 함께 울며 그들의 희망이 되려는 이의 삶을 보자.

 

▲ 역사의 한컷 '어머니' -by 전승일

 

나의 죽음으로 남의 희망이 된

문익환의 글을 다시 읽게 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갈릴리 민중의 고난과 해방을 말하고, 서울 평화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기둥으로 쓰러진 전태일이 다시 수만 명 노동자의 외침 속에서 부활한다 했다. 문익환 자신도 부활한 전태일이 되려 했다. 죽은 채 두지 않으려 했다. 전태일의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사라짐은 소멸이 아니다. 우리네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정 속에 부활해있다. 우리든 촛불에 녹아들어 있었다. 죽은 남이 아닌 우리의 모습으로 여전히 있다.

나의 죽음으로 남의 희망이 된 죽은 나무가 사실 죽지 않고 부활하였듯이, 전태일의 죽음이 그 한 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듯이, 일제 강정기와 독재 수많은 생명이 ‘나’ 하나의 몸을 버리고 우리의 희망으로 부활하였듯이, 지금 우리의 삶도 부활을 생각해 볼 때이다. 아니, 그냥 생각하는 것을 넘어 그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할 때다. ‘나’ 하나의 욕심을 버리고 ‘우리’의 희망으로 부활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욱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살아가야 할 때다. 지금 말이다.

<유대칠 님은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전공하며,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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