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준 500원…아버지의 소주값…그리고 눈물
어머니가 준 500원…아버지의 소주값…그리고 눈물
  • 김덕희
  • 승인 2018.04.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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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어머니에게 받은 500원. 그 돈은 내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큰 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조그마한 구멍가게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난 설마했다.

그 당시 소주 한 병 가격이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80-90원 정도 하지 않았나 싶다. 소주를 한 병 사신 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받은 돈을 달라고 하셨다. 설마, 했는데…순간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미웠다.

아버지 곁을 떠나는 게 싫어, 아버지 혼자서 술에 젖어 사실 게 두려워, 그토록 발악을 해서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택시 유리창을 깨트릴 때 다친 손등은 계속해서 통증이 가라앉질 않고 있었다. 사실 이곳까지 올 때도 때문에, 아버지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어떤 얘기도 붙이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뒤만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돈을 달라니…. 난 그 돈으로 공책도 사고 할 계획까지 전부 세워 두었는데 말이다.

절대 돈을 드릴 수가 없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뾰로통한 모습으로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졌다. 한 대 때리기라도 하실 태세였다.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대신 돈을 아버지께 드리질 않고 내가 직접 소주값을 계산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한꺼번에 여러권의 공책을 사버렸다. 당시만 해도 조그마한 구멍가게에서도 공책 등 문구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교과 과목수에 맞게 공책을 살 수 있었다. 빳빳한 종이질로 된 공책이 손아귀에 한아름 쥐어지자 기분이 붕 떠올랐다. 아버지는 한쪽 구석에 놓인 허름한 탁자에서 소주를 드시고 계셨다.

그렇게 한참동안 공책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아버지였다. 시간이 지나고 소주병이 비워질수록 아버지의 흐느끼는 소리는 커져갔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구멍가게 주인이 당황스런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그렇게 소리내어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순간 아버지를 원망했던 좀 전까지의 감정이 눈이 녹듯 녹아내렸다. 난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고 함께 울었다.

아버지는 많이 서러우셨나 보다. 다시 찾아온 어머니를 붙들지 못하고, 또 하나 있는 아들까지 떠나보내려 했다가 결국 손에 깊은 상처까지 생기게 했으니…. 내 손에 생긴 상처보다 몇십배는 더 큰 상처가 아버지 마음 깊숙한 곳에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었다.

날이 저물었다. 어두움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아버지는 구멍가게에서 나오셨다. 그리고 8km나 떨어진 집까지 밤 늦게까지 흔들리는 발걸음을 떼어 집으로 돌아왔다. 난 아버지가 혹시 넘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뒤를 따랐다. 삼십년이 훌쩍 지난 그때 일이 지금도 마치 어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머리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다음날 일찌감치 눈을 떴다. 학교를 가야 했다. 하지만 웬지 겁이 났다. 학교에 가는 길에, 혹은 학교에서, 아니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나 외삼촌이 나타나 다시 나를 붙잡아 가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손에 깊은 상처까지 입어 가며 어머니를 뿌리쳤지만 어머니가 힘이 아주 센 사람들 여럿을 보내 다시 나를 잡으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늘 다니던 넓은 신작로 길을 피하기로 했다. 대신 굽이굽이 산골짜기 좁은 길을 택했다. 물론 시간은 훨씬 더 걸렸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늘상 운동장을 주시하며 혹시 모를 사태에 긴장해야 했다. 집에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꼭 산골짜기 길을 통해서 돌아왔다. 하지만 별 일은 없었다.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으셨고, 외삼촌도, 다른 힘 센 사람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난 그렇게 약 6개월 정도는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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