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바닥에 뻘바닥에 핀다
흙바닥에 뻘바닥에 핀다
  • 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
  • 승인 2018.04.0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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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지지 않는 꽃-백만 송이 몸뻬꽃
▲ 가만히 눈 대고 보면 아직 바람 찬 들판에 뻘밭에 고물고물 엎드린 꽃송이가 지천이다. 만재도

봄꽃의 북상 속도는 하루 20㎞ 정도라던가. 매일 오십 리 길을 부지런히 올라오며 꽃등 들어 봄 밝히는 꽃소식이 ‘오늘의 늬우스’인 계절.

가만히 눈 대고 보면 아직 바람 찬 들판에 뻘밭에 고물고물 엎드린 꽃송이가 지천이다.

이날 평생 흙바닥과 뻘바닥과 한통속으로 살아온 어매들이 ‘촌 어매의 의복’으로 정해진 듯 입고 나선 몸뻬는 온통 꽃천지. 만화방창 흩날리는 백만 송이 몸뻬꽃을 피부인 양 걸치고 다니는 한몰떡 쌍암떡 고치실떡…. 그이들이 품고 다니는 꽃들은 사시사철 지지 않는다.

 

▲ 영광 묘량면 월암리 사동마을
▲ 평생의 이력이 그 손에 새겨졌다. 여수 율촌면 반월리
▲ 꽃길만 걸으려 하지 않은 그 사람의 발태죽. 화순 남면 절산리 장선마을

 

“우리는 순 흙몬지 순 흙구덕에 살아. 먹글자가 안 든 사람이라. 말건 자리는 공부 높은 사람이 살제.”

남원 이백면 강기리 내기마을 이옥명자 할매한테 일생의 옷은 몸뻬다.

“모다 흙몬지 안 난 디로만 찾아댕기문 쌀은 어느 자리서 나오며 짐치는 어느 자리서 나오겄는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지은 서유구는 입으로만 만리장성을 쌓는 이들의 먹물짓을 ‘토갱지병(土羹紙餠·흙국과 종이떡)’이라 하였다.

 

▲ 칼 한 자루 호맹이 한 자루 들고 들에 나설 적 당연한 듯 걸치는 의복 몸뻬. 남원 금지면 방촌리.
▲ 순천 주암면 오산리 용곡마을
▲ “호랑이의 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무늬는 안에 있다.”겉에 두른 꽃무늬처럼 속무늬조차 고울 어매들. 진안 동향면 학선리

 

흙으로 국을 끓이지 않고 종이로 떡을 찌지 않고 사는 것은 온전히 흙투성이 뻘투성이로 사는 그이들 덕이다. 공부 높은 사람으로 ‘말간 자리’에 앉은 이들은 흙몬지와는 거리는 멀다.

〈표고 45미터에서 잠자고, 지하철을 한 시간 타고 도심으로 나와서 지상 21층에서 일하다가, 점심 때는 대개 29층 구내식당에서 밥 먹고, 저녁에는 간혹 지하 생맥주집에 들렀다가 곧장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간다/ 그래놓고 보니, 하루에, 내가 땅과 구두밑창이나마 살 문대는 시간은 평균 채 한 시간이 안 된다/ 지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지, 땅으로부터 추방당한 지 벌써 십 년여〉(이문재, ‘그날이 어느 날’ 중)

땅으로부터 추방당하지 않은 사람들, 허공에 뜬 공중누각 같은 곳이 아니라 땅바닥에 뻘바닥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은 걷고 있는 길이 가시밭길 자갈밭길일지라도 한사코 발 디딘 자리에서 꽃을 피워내고 있다.

 

▲ 여수 두라도
▲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꽃무늬인 이 담대한 패션을 능히 소화해 내는 할매. 무안 일로장
▲ 걷고 있는 길이 돌밭길일지라도 한사코 발 디딘 자리에서 꽃을 피워내는 걸음걸음. 장흥 용산면 상발리 남포마을

 

“손구락이 열 개인 것이 얼매나 고마워. 이 손구락으로 흙을 파서 밭을 맨들고 곡석을 맨들고 자석을 키왔어.”

김재순(76·곡성 청계면 노동리) 할매는 흙수저로 태어나서 없는 집을 만들고, 없는 밭을 만들고, 없는 논을 만들며 3남매를 키웠다. 손바닥만한 땅도 꽹이로 호맹이로 파야 만들던 시절이었다.

“나는 농사 지슨 것을 기적이라고 보네. 봄에 종자 한 주먹 갖다 놓고 가실에 호복하니 가져간게 기적이제.”

봄여름내 쟁쟁한 뙤약볕 이고 풀 맨 공력은 잊고 사시나 보다. 흙바닥에 뻘바닥에 엎드려 바친 ‘내 몸공’을 들추어내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

 

▲ 곡성 죽곡면 유봉리 가목마을
▲ 말하기보다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옷, 몸뻬. 고흥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
▲ 완도군 군외면 황진리 토도

 

“시방은 일방석 달고 다닌께 행복이여. 방석 있기 땀새 핀히 앙거서 허제.”

일구덕이 불행이 아니라 일방석이 행복이라 하는 장성 단전마을의 단전할매. ‘인생을 향해 미소 지으면 반은 당신의 얼굴로 반은 타인의 얼굴로 간다’ 하더니, 할매가 시방 웃는 웃음의 반이 나에게로 건네진다.

“올 시한이 얼매나 독합게도 추왔는가. 저꺼(겪어) 나온 것이 장허제.”

무안 가인리 양영심 할매에겐 뾰족뾰족 이파리 세우고 있는 어린 마늘이 자식처럼 짠하고 장하다.

“우들은 오늘 벗은 옷을 내일 입을 수 있을지 어짤지 몰라.”

 

▲ 해남 북일면 내동리
▲ 평생 흙바닥과 뻘바닥과 한통속으로 살아온 어매들이 ‘촌어매의 의복’으로 정해진 듯 입고 나선 몸뻬는 온통 꽃천지. 이 땅의 주연이신 꽃무늬 어매들. 나주 산포면 화지리 홍련마을
▲ 고금도

 

〈나는 이제 오방파방 놀노나 다니다 나 갈 띠 갈나고 한다. 내가 앞푸로 얼마나 살낭가 몰나도 앞푸로 살나갈(살아갈) 이리 망막캈다. 회관 가서 홧토나치고 놀나다.〉

일기장에 그렇게 쓴 진안 동향면 학선리 성영경 할매의 결심이 맨날 ‘작심일일’인 것처럼, 오방파방 놀노나 다니지도 않고, 회관 가서 화토도 안치고 만날 들에 밭에 엎드려 있는 할매들.

내일과 다음 생 중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생애의 날들에도 호맹이 자루 드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은 ‘호미 끝에 백 가지 곡식이 달렸다’는 진리를 몸소 아는 까닭이다.

“인자 얼굴이 사그라진께 일옷이라도 피는 것으로 입어야제.”

함평장에서 만난 팔순 할매의 옷 고르는 법이 그리 애틋하다.

 

▲ 무안 해제면 유월리
▲ 영산도
▲ 고창 고수면 와촌리

 

시방 촌마을 열린 대문 안으로 슬쩍 비친 빨랫줄에 가장 많이 걸려 있는 옷은 몸뻬. 어제도 오늘도 밭에 다녀오셨노라고, 깃발인 양 흔들리는 ‘꽃무늬’. 그리하여 봄여름가을겨울 빨랫줄에 피어나는 사철꽃 몸뻬꽃.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사람을 볼 때는 겉무늬를 보지 말고 속무늬를 보라는 라다크의 속담이다. 속무늬도 겉무늬를 닮아 ‘한사코 꽃무늬’로 살아가는 어매들.

〈세상사를 말할 때는/ 겉만 보고 말하지 마라/ 홀로 꽃 피우고 맺힌/ 호박덩이일지라도/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박철영 ‘늙은 호박’ 중)

 

▲ 화순 도암면 도장리
▲ 여수 소라면 사곡리 궁항마을
▲ 영산도

 

푸근한 낯빛과 푸짐한 속정으로 ‘항시 내 앞에 온 그 사람을 대접 할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듯 일기일회의 일념으로 환대하는 삶을 살아온 늙은 어매들.

〈마음에 망령된 생각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오래 하면 마음에 꽃이 핀다. 입으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오래 하면 입에서 향기가 난다.〉

조선조 문인 이덕무의 경구를 읽은 적 없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씀마다 향그럽다.

“봄 돌아오문 어서 씨갓 넣고자와서 자꼬 딜다봐. 얼릉 날이 샜으문 그 맘뿐이여. 얼릉 날 새라, 날 새야 일 나가제 그 맘이여.”

곡성 죽곡면 가목마을 박순금 할매. 그이가 아끼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몸뿐이다.

“팽야 흙 되야 불 것인디 뭐이 아까와.”

그리하여 해가 뜨기도 전에 차리는 행장은 늘 그러하듯 몸뻬.

 

▲ ‘허수아비’ 아닌 ‘허수어매’의 새를 쫓는 복장도 어매들을 탁해서 온통 꽃무늬
▲ 빨랫줄에 널어둔 꽃다발. 군산 경암동 철길마을
▲ 어매를 생각할 적이면 늘 떠오르는 꽃, 몸뻬꽃. 화순 한천면 정산마을

 

일제강점기 이 땅의 여성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숭악한 속셈으로 아녀자들의 작업복으로 강요된 몸뻬. ‘고쟁이 바람’이라 하여 망측하고 남사스럽게 여겨졌던 몸뻬는 이제 촌 할매 하면 떠오르는 익숙하고 친근한 입성이 됐다.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 고급옷 로비사건이 터졌을 때 ‘활빈단’이라는 단체가 장관 부인들에게 자숙의 의미로 몸뻬를 보낸 적이있다. 3000원짜리 몸뻬와 3000만원 밍크코트를 대비시키고, 놀고먹지만 말고 일 좀 하라는 뜻에서였다.

‘헌옷 입고 일하기 좋고, 새옷 입고 말하기 좋다’ 하였다. 고무줄을 넣은 허리춤과 통이 큰 바지춤이 넉넉하여 온갖 들일 갯일에 편하다는 미덕을 가진 몸뻬는 말하기보다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옷이다. 8등신 모델보다 땅 가차이 몸을 낮출 줄 아는 이들의 몸에 가장 어울리는 옷이다.

몸뻬에 윗도리에 모자에 버선까지 두루두루, 족보도 없고 어느 식물도감에도 나오지 않는 백만 송이 꽃을 난분분 거느린 할매들의 활연한 자태는 당연히 ‘촌스럽고’ 또 ‘촌답다’.

이 너른 들과 이 너른 뻘을 배경에 둘 수 있는 이 땅의 주연은 당연히 꽃몸뻬 할매들이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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