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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옳고 너도 옳다”

<삶&> 류승연 류승연 기자lscaletqueen@naver.coml승인2018.04.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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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아빠는 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부터 이 얘기를 자주 하곤 했다.

회 좀 먹어보라고 하면 “으으~ 절대 싫어요”라고 말하는 내게,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라 하면 “공무원처럼 심심하고 재미없는 건 절대 안 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내게, 아빠는 늘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절대’라는 말은 쓰는 게 아니라고.

대략 30년 전부터 들어온 그 얘기를 이제야, 이 정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깨달아 가는 중이다.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걸.

 

 

모처럼 여유를 부리는 평일 오전의 어느 날. ‘쓰기의 말들’ ‘싸울수록 투명해진다’ ‘출판하는 마음’ 등 의미 있는 저서를 여러 권 출간한 은유 작가의 SNS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다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이는 글 하나를 발견했다.

“이삼십 대엔 나도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사십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 원래 그래,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어쩐지 서글프다. 언제 잊었는지도 모르는 첫사랑처럼 순간 멀어졌던 그것, 무수한 사유의 새순을 피워 올리는 단어, 어정쩡함이란 말을 이 봄에 다시 내 것으로 삼는다.”

은유 작가의 이 글은 ‘행복이 가득한 집’ 4월 호에 실린 ‘어정쩡한 게 좋아’ 중 일부다.

어정쩡한 게 좋단다. 어정쩡한 게 좋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우유부단하고 어정쩡한 태도는 내가 가장 배척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정하지 못하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기만 했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고 분명한 태도로 당당히 소신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매력적이다. 또한 그래야 주변에 의도치 않은 피해를 덜 끼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서넛이 모여 커피를 마신 후 밥을 먹으러 가기로 한다. “뭐 먹을까?” 언제나 그것이 문제다. 밥 먹는 시간보다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아무거나”라고 대답한다. 여기도 아무거나, 저기도 아무거나.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나서서 메뉴를 정하고 나면 그 때서야 나머지 사람들도 “좋아”라며 우르르 따라 나선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는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행동에 나선다.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이들은 먼저 행동에 나선 이의 뒤를 조르르 따라간다.

나는 그런 태도를 답답해했다. 너의 의견을 확실히 말하란 말이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건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는 거랑 다를 게 뭐야. 그래놓고 속으론 딴 말 하지 말고 너의 의사를 당당히 밝혀!

나는 늘 속으로 이런 말을 외치곤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속으로’다. 속으로. 대놓고 말해서 남에게 상처 줄 용기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랬던 나였는데 어정쩡한 게 좋다는 은유 작가의 글이 가슴에 파고든다. 다른 것이 아닌 유독 그 글에 꽂혔다는 건 내가 지금 그에 공감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글 속의 무언가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는 얘기다.

그래.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찬 태도. 좋다. 멋져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멋지고 당당하고 신념이 있어 보이기에 사람들이 혹 한다.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확실한 성격도 마음에 든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성향이 확실하니 주변 사람들도 대하기가 오히려 편하다. 성격이 맞으면 같이 가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중간은 없다.

나도 그랬던 사람이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었다. 어정쩡한 단계는 싫어. 모든 것은 확실성을 띠고 있어야 하고, 확신을 밑바탕에 두고 있어야 해. 그렇지 못한 너는 얼마나 비겁한 사람이란 말이냐. 소심쟁이! 기회주의자! 나는 어쩌면 그런 눈으로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절대 무엇을 하지 않을 거야”라는 확신에 찬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물컹물컹 씹히는 회 같은 건 절대 먹지도 않을 것이고, 심심하고 재미없는 직업인 공무원 같은 건 절대 하지도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다. 인생은 그렇게 언제나 확신하며 살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인생은 고비 고비마다 개인의 확신을 무너트리는 깜짝 선물을 준비해 놓고 기다린다. 내가 뜻한 대로만 이뤄지는 인생이란 없다.

지금의 나를 보라. 회를 즐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부드러운 광어회를 초고추장 듬뿍 찍어 먹는 재미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절대로’ 먹지 않겠다는 확신은 무참히 깨진 셈이다.

심심하고 재미없는 공무원? 아이를 출산하고 몇 년씩 육아휴직을 하다가도 순조롭게 복직하는 여동생과 올케를 보니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 공무원인 것 같다.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감사합니다”하며 열혈 공무원이 되리라.

사람은 변한다. 그 변화는 시간이 이끌어 낸다.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쌓인 경험이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변화시키고, 종국엔 그 사람마저 변화시킨다.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절대적인 확신이란 더더욱 없다.

아빠는 그런 삶의 진리를 알고 있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절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딸에게 그 말의 위험성을 경고해 주고 싶었다. 너무 어린 딸은 비록 30여년이 지난 후에야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은유 작가 역시 그런 확신적인 태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특히 확신의 방향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게 될 때는 더욱 위험하다는 것까지.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는 고백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자기 확신이 패기로 비춰지는 20~30대까지는 어느 정도 확신적인 태도로 살아나가도 괜찮다. 젊다는 것에서 면죄부를 받는다. 아직 인생을 다는 모르니까, 마음껏 부딪혀봐야 할 나이니까, 그 때는 그러한 확신과 패기가 삶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면서 넘어가 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의 반을 넘어간 불혹을 지나면 이제 더 이상 젊음이란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살아온 인생만큼의 깊이가 쌓여야 한다. 이른바 나잇값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중년이라면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자기 확신이 무조건적으로 배척당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른바 신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기 확신은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더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할 것이다. 인생을 살아나가는 신념 하나 없는 중년이라니. 왠지 그의 삶은 좀 허망할 것 같지 않은가!

다만 자기 확신의 방향은 오로지 자신을 향해야 한다. 그 확신의 방향이 타인을 향하게 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너는 왜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행동하지 않느냐며 타인을 압박하고 구속한다면 그건 확신에 찬 사람이 아니다. 자기 우물 안에 빠져 있는 사람이 될 뿐이다.

그래서 와닿았을 것이다. 어정쩡한 게 좋다는 글이 와닿은 것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살다보니 느끼는 거? 남을 용서하기보다 남을 미워하는 게 쉽고, 남을 이해하기보다 남을 오해하는 게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쉽다. 그런 게 더 쉬운 일이다. 그러니 남을 용서하고, 남을 이해하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타인에게 관대한 사람이 되려면 내 스스로가 갖고 있는 자기 확신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신념과 고집 사이에서 적절한 중용을 지킬 수 있어야 하고,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절대’라는 말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하고, 어정쩡한 태도로 타인을 위한 내 마음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도 필요하다.

이제 불혹을 넘어가고 나니 알겠다. 보인다. 이런 것들이. 그리고 “허허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했던 황희 정승이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도 이제야 알겠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다잡는다. 나 또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인물이 되지는 말아야지. 내 스스로의 신념을 위한 자기 확신은 얼마든지 오케이지만 그 확신이 타인을 향하는 무기가 되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아야지.

황희 정승이 될 수는 없어도 머리가 백발이 된 어느 날이면 “허허 너도 맞고 너도 맞다”는 어정쩡한 태도의 내가 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지. 모처럼 여유를 부리는 평일 오전의 어느 날, 이렇게 또 하나 배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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