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지지 않는 꽃-창호문에 꽃잎

 

한겨울이라야 걸 수 있는 꽃그림이 있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이다.

‘구구(九九)’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겨울, 동지 다음날부터 81일까지를 이르는 말.

동짓날에 여든 한 장의 꽃잎을 가진 흰 매화 한 가지를 그려 놓고 다음날부터 매일 한 잎씩 칠해나가는데 마지막 한 잎을 칠하는 날이 경칩과 춘분의 중간, 3월10일 무렵이다.

이때쯤 구구소한도를 떼내고 창문을 열면, 매화가 피면서 바야흐로 봄이 당도하는 것이다. 깊은 겨울의 한 가운데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어두워지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봄으로 다가서려 한 그 마음이 화사하게 빛나는 꽃그림이다.

 

 

창호문을 바를 적에만 걸 수 있는 꽃그림도 있다.

<일년에 한 번은 집이/ 장구 소리를 냈다/ 뜯어낸 문에/ 풀비로 쓱싹쓱싹/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이었다/ 한 입 가득 머금은 물을/ 푸-푸-골고루 뿌려준 뒤/ 그늘에서 말리면/ 빳빳하게 당겨지던 창호문/ 너덜너덜 해어진 안팎의 경계가/ 탱탱해져서,/ 수저 부딪는 소리도/ 새소리 닭울음소리도 한결 울림이 좋았다> (손호택, ‘집장구’ 중)

집이 장구 소리를 내던 그 날은 가을걷이 끝난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햇볕 바르고 바람 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방문을 떼어 누렇게 빛바래고 더러 구멍 뚫린 묵은 문종이를 떼어내고 뽀얀 새 창호지를 차르르르 바를 적 화룡점정은 창호지 사이에 꽃을 먹이는 일이었다.

꼭 마른 꽃이 없어도 좋았다. 물든 이파리 두서너 개곱게 얹어 바르면 그것으로 족하였다.

꽃이 아니라도 꽃처럼 봉긋하게 피워두었으니 들명날명 방문을 밀고 닫을 적 문고리 가까이 자리한 단아한 꽃송이에 눈을 대는 것은 작은 사치였을 것.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함은 이런 풍경을 이르는 말일 터이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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