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갈노> 기억, 살아 숨쉬는 인격 / 조희선

이야기 하나,

굴레방다리에서 아현시장 골목을 지나 어느 정도 걷다보면 오르막 시멘트 계단이 30미터쯤 이어진다. 그 계단 어디쯤인가 오른쪽으로 대문 하나가 나타난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5미터 정도 좁고 긴 길이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시멘트벽이고 그 끝에 냄새나는 재래식 변소가 있다. 오른쪽 옆으로는 화단이 있다. 붉은색, 노란색, 주황색 꽃을 활짝 피운 채송화가 있다. 통통한 연초록 줄기들이 살아 움직인다. 분홍 분꽃, 분홍, 보라, 파란 빛을 한 나팔꽃, 자줏빛 맨드라미, 빨간 글라디올러스들도 철을 따라 피고진다. 화단이 끝나는 곳에 방 하나 부엌 하나로 된 독채 집이 있다. 한일관에 다니던 아저씨와 부인, 딸아기가 세 들어 사는 집이다.

왼쪽으로는 역시나 시멘트로 된 회색 마당이 있다. 마당 왼쪽으로는 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각각 방 하나씩 있는 집이 있다. 그 오른쪽 방 벽에 90도 각도로 또 부엌이 붙어있고, 또 그 부엌 옆으로 방 하나가 더 있다. 할머니, 아버지, 엄마, 큰오빠, 큰언니, 우리 5남매, 여덟 식구가 2년 남짓 살았던 북아현동 우리 집이 내게 옛 이야기로 말을 걸어온다. 그 집은 단지 공간이 아니다. 기억이 살아 숨 쉬는 인격이다.

 

▲ 우리 아파트 뒤편의 텃밭 모습. 상암두레텃밭이다.

 

이야기 둘,

한일관에 다니던 아저씨가 퇴근길에 개에게 먹이라며 손님들이 남긴, 비교적 살이 많이 붙어있는 갈빗대를 가져오곤 했다. 엄마는 그 갈비를 푹~ 삶았다. 다음날이면 엄마가 부엌문을 열고 나를 불러들였다. 그때 그 부엌에서 먹은 갈비 맛이란 지금까지 먹어본 어떤 갈비보다 최고였다. 그 집에서 이사한 얼마 뒤, 아저씨의 어린 딸이 갑자기 쓰러지더니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여덟식구는 ㄱ자 집에서 지냈다. 나는 마루 오른 쪽 엄마와 아버지가 지내는 안방에서 자기도 하고, 할머니와 작은언니, 작은오빠가 지내는 마루 왼쪽의 건넛방에서 자기도 했다. 엄마와 잘 때면 할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큰오빠는 대학 2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있었다. 휴가를 나오면 안방에 붙어있는 다락에서 잠을 잤다. 안방 벽에 다락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면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향기 나는 꿀, 귤, 바나나 등 아버지께 선물로 들어온 이런저런 귀한 것들이 있곤 했다. 그곳을 딛고 올라가면 다락이다. 그곳에서 아버지한테 허벅지를 맞은 적이 있다.

반찬투정을 하고 다락 위로 올라갔을 때였다. 아버지의 매는 평생 그때 한번 뿐이었다. 큰언니는 어디서 지냈던 것일까? 부엌을 사이에 두고 있던 또하나의 방, 바로 그 방에서 큰언니가 지내기도 했고, 만화공장에 다니는 창화, 창숙이 언니가 살기도 했다. 큰언니와 창화, 창숙이 언니 중 누가 먼저, 또 언제부터 언제까지 그 방을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창화, 창숙이 언니와 재미있게 공기놀이를 한 것만큼은 생생하다.

오늘까지도 그 이름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큰언니가 그 방에서 지낼 때 방 한구석에 일년치 식량 쌀가마니가 쌓여있었다. 여름이 되면 그 쌀가마니 주위에 작고 하얀 구더기 비슷한 벌레들이 스물스물 기어다녔다. 끔찍했던 일이지만, 엄마 몰래 쌀을 훔쳐 뻥튀기를 해먹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방은 죽은 병아리를 살려내기도 했다. 추운겨울 학교에서 오는 길에 산 병아리가 집에 오는 동안 얼어 죽었는데 큰언니가 방바닥에 죽은 병아리를 드러눕히자 조금 후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 병아리는 결국 그 뜨거운 방바닥에서 질식사하고 말았으니, 두 번 살고 두 번 죽은 것이다. 시멘트 마당에는 펌프와 수도,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에는 높은 담이 있었는데 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낭떠러지였고, 그 아래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그 집은 높은 지대에 있었다. 하여 한여름이면 물이 나오질 않아 아래동네에 가 긴 줄을 서서 물을 배급을 받아와야했다. 나도 가끔씩 줄을 서야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기억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단단하게 알이 배긴 굴비구이가 밥상에 자주 올라왔다. 엄마는 연탄불위에 굴비며, 꽁치며, 갈치를 구웠고 한 장 한 장 손으로 기름칠 한 김을 구워 밥상에 올리셨다. 여덟식구 밥에 다섯남매 도시락을 싸는 것만으로도 부엌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엄마는 틈을 내 조화를 만들고, 친척 언니가 하는 만두집에 나가 카운터를 보셨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출현한 분홍색 이층 플라스틱 필통을 사주셨다.

그때 엄마의 얼굴은 나보다 더 기뻐하고 있었다. 뜨개질로 스웨터를 떠 입혔고, 아현시장에서 내 맘에 꼭 드는 원피스를 사주셨다. 그런 엄마가 나와 백화점에 갔을 때, 1만5000원 하는, 엄마 맘에 꼭 드는, 흰색과 하늘색 가는 체크무늬의 면 원피스를 사입지 못하셨다. 그 원피스는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모든 것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시간은 충분히 느리게 갔고, 마음은 풍요로웠다.

 

이야기 셋,

▲ 글쓴이 조희선님과 딸 오지은님 (작게)

이후 5번의 이사를 더 하신 후 5남매가 다 출가해 자신들의 아이들을 가졌을 때,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하셨다. 결혼 후 처음 서울을 떠나 젊은 시절 꿈을 담아 집을 지으셨다. 과학관 교사였던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강의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으나 시골학교로 가서 텃밭을 키우며 살자고 한 엄마의 청을 받아들여 가기로 한 문산고등학교. 그곳으로 가기위해 이삿짐을 싸놓은 후, 황해도 배천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인사하러간 그날 6.25가 터졌고 피난민이 되었다. 그 바람에 이루지 못한 꿈을 담아 예순을 휠씬 넘긴 그제야 지은 집이었다. 경기도 평택군 청북면 토진리 너른 땅에.

우리 5남매와 그 남매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시골집이 생겼다. 문만 열면 계절마다 연두색, 초록색, 갈색, 하얀색으로 옷을 바꿔입는 살아있는 흙이 있었다. 그곳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부모님은 20년 가까이 가꾸었던 모든 것들을 놓고 그 집을 떠나야만 했다. 토지개발계획 안에 포함된 것이다. 보상금을 받아 다시 집을 지으셨다. 그곳이 율포리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였을 때 저만치 높이 있던 인격이 땅 아래로 떨어진 것 같다고 하셨다. 이미 83세로 심신이 허해진 엄마를 그곳에 남겨둘 수가 없어 큰언니 집으로 모셨고, 그 집은 우리의 웃고 울었던 기억을 간직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평택고덕 신도시계획으로 지역 주민들의 집과 일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의 계획에 대해 84%의 주민이 반대했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수차례의 보상연기로 어려움을 겪었다. 뒤늦게 받은 보상비가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생전 처음 현금을 쥐게 된 어떤 이들은 도박에 손을 댔다가 돈을 잃고 병을 얻어 죽기도 했다. 땅 소유주인 부모 몰래 자녀들이 서류를 위조해 팔아버렸고, 가족들의 싸움이 이어지다 해체되었다는 등의 흉흉한 이야기들도 들려왔다. 그런 아픔들을 뒤로 하고 지금 평택고덕신도시는 거대도시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은 한 차원 높은 품격있는 문화도시, 국제도시로 만들겠다는 공약들을 내놓고 있다.

 

이야기 넷,

보상비 문제로 엄마를 모시고 개발사무소에 다녀왔다. 가는 길부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보아왔던 평화로운 논, 밭들이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 양 옆길에 끝도 없이 지어지는 거대한 아파트들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는 지평선까지 붉은색 흙더미가 또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넓은 지역이 송두리째 뒤집혀져 있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내가 알던 골목길, 잔디가 잘 정돈되었던 이장집, 조금 걸어나가면 보이던 젖소들과 우유공장, 흙길 옆으로 담 없이 형형색색 꽃을 피웠던 은근히 탐나던 조용한 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눈앞의 저 거대한 붉은 흙더미 안에 생매장 당한 것이 분명했다. 대량학살이 있었던 것이다.

한 때 내가 살았던 개포동, 잠실, 중계동,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상암동의 아파트 단지들 모두가 그렇게 세워졌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1970년대 강남땅을 향한 위험한 욕망이 춤추기 시작하면서 이후 쉼 없이, 손바닥만 하고 낡고 오래된 작은 집들과 땅, 그 안의 힘없는 작은 사람들이 숨 쉬던 공간들은 대량학살을 당해왔다. 그 위에 대기업들은 '새롭게 새롭게'를 외치며 최신의 방식으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들을 세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몰려들었고, 나 역시 그렇게 더 좋은 아파트를 찾아 이사를 다녔다. 복도식 아파트에서라면 얼굴을 마주하던 이웃들을 더 좋은 계단식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넉넉해진 것 같았지만 실은 세상의 각박함을 느끼곤 한다.

 

 

이야기 다섯,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성실하게 살다보면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아파트들이 투기 대상이 되고 값은 천정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는 가운데 청년들은 n포 세대가 되었다. 땅에 묻혀 대량 학살당한 작고 힘없는 공간들의 역습은 아닌가싶다. 세상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적게 가진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 그 욕망을 채우는 구조로 돌아간다. 작아서, 힘이 없어 땅 속 깊은 곳에 묻혀버린 그것들을 위해 이제라도 위령제를 지내야 할까 싶은데,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대량학살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도리어 매몰당할 것 같던 힘없고 작은 젊은이들이 한쪽에서 부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출판산업이 휘청거린다고 하지만, 더 다양한, 그리고 거대한 시스템이 만들어낼 수 없는 재미있는 독립잡지들을 젊은이들이 만들어낸다. 물론 돈벌이가 되지는 않지만 가치를 추구한다.

대기업의 뚜레쥬르와 파리바게트가 휩쓸면서 사라져버렸던 작은 빵집에서, 스타벅스 등 거대한 커피 체인점들 사이의 작고 개성있는 공간에서, 거리의 다양한 청년마켓에서 부활하는 젊은이들을 만난다. 애초에 큰 부를 축적할 수 없게 된 젊은이들이 별 수 없이 의미와 가치를 찾아 느린 삶으로 시간을 찾으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지난 세대가 생매장했던, 작아서 힘이 없어 살해당했던 것들을 청년들이 구원해주기를 미안한 마음으로 기대하지만, 마음이 짠~하다.

도무지 자질구레한 것을 사지도 모으지도 않던 내가 얼마 전 작은 만화경을 샀다. 까맣게 잊어버린 어린 시절과 이야기를 해본다. 아파트 후문 건너편에 있는 작은 텃밭에서 햇볕을 받으며 제철에 자라는 상추와, 토마토, 가지들을 보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조희선님은 오랫동안 캠퍼스 청년사역자로 활동해온 목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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