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잠든 도시에도 아침은 온다
깊이 잠든 도시에도 아침은 온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8.05.03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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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아홉번째 이야기 / 강진수

 

17.

마을로 다시 내려오자마자 빵집에 들러 빵을 몇 개 샀다. 그리고 호스텔로 돌아가 맡겨놓은 짐을 찾았다. 우리를 데리러오는 콜렉티보를 타기 위해서는 서둘러 하산을 해야 한다. 어제 올라온 길을 다시 되짚어 내려가야 한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콜렉티보도 못 탈뿐더러 쿠스코로 돌아갈 기회도 잃어 오고가도 못하게 된다. 어제와는 달리 비도 내리지 않고 날은 맑았다. 흙도 따뜻하게 건조되어 걸어갈 때마다 발끝이 부스럭거렸다. 너무나도 짧게 마주한 마추픽추와의 아침이었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만족했다. 만족하는 발걸음으로 어제와는 달리 안데스 산맥 이곳저곳을 살피며 걸을 수 있었다. 철로에는 벌써부터 부지런히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들어오는 열차를 보며 우리는 반대로 걸었다.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는 사람들에게 같이 손을 흔드며.

철길 위를 얼마나 걸었을까, 흙빛의 강물이 시원하게 우리 옆을 스쳐지나갔다. 어제 정신없이 빗길을 걸을 때에는 안 보였던 풍경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힘차게 꿀렁거리는 강물 위로 위태롭게 서있는 징검다리도 새롭게 보였고, 강 건너 편의 산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나무들도 새롭게 보였다. 갈색 나비들이 어디서 포르르 날아와 내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들도 잠시 쉬어 가는지 철길 옆에 모여앉아 한낮의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나비들과 더 놀고 싶었지만 두시까지 콜렉티보를 타러 가야하는 우리의 숙명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강물도 저렇게 바삐 흐르는데, 우리가 쉬어야 할 시간은 없다. 챙겨놓은 빵으로 점심식사를 대충 해가면서 서둘러 주위를 살피고 걸었다. 주위 사람들 역시도 다 콜렉티보를 타러 철길을 걷는 모양이었다. 내가 앞서 걷다, 다른 사람이 또 나를 앞서 걷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우리는 어제보다도 더 빨리 길고 긴 산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날은 더웠다. 아침에 서늘하다고 껴입은 옷들을 벗어 등허리에 묶은 다음 계속 걸어 결국엔 콜렉티보가 모이는, 어제의 출발점이었던, 간이기차역에 도착했다. 간이역에는 또 하나의 기차가 떠나기 위해 뜸을 들이고 있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속속 역으로 들어섰다. 역 근처는 사람들로 완전 시장터 같은 모양새였다. 역 바로 옆에서 우리도 시원한 물을 좀 사들고 콜렉티보가 오기로 한 곳으로 갔다. 그곳엔 이미 어제 콜렉티보를 같이 타고 온 캐나다 친구들이 더위에 지쳐 나무 그늘 밑에서 앉거나 누워 쉬고 있었다. 우리도 인사를 슬쩍 나누고 그들 옆으로 갔다. 농담이나 주고받다가 시간이 늘어지자 그들은 어제의 콜렉티보에서처럼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날은 가면 갈수록 더 더워졌고 태양은 어제 자신이 그립지 않았냐는 듯 뜨거운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오후 3시가 되고 4시가 되어도 콜렉티보는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냥 불안하지는 않았던 것은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역시 자신의 콜렉티보를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루에서는 약속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쯤은 흘려보낼 수 있어야 여행을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더 진중하고 위대한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가 있다. 그런데도 좀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 어김의 정도가 심할 때가 있다. 아마 이때가 가장 심했을 때 같다. 5시가 지나고 6시가 되어서야 콜렉티보가 왔다고 그곳 상황을 정리하던 여행사 직원들이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우리는 캐나다 친구들을 비롯하여 어제 함께 콜렉티보를 탔던 모두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드디어, 라는 단말마를 뱉었다. 기다림에 너무 지쳤지만 뭐 어쩌겠는가.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저들에게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우리 체력도 이미 동이 나버린 상태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명단을 읽으며 콜렉티보에 차례로 사람들을 태우던 여행사 직원이 나와 형, 우리 둘 이름을 빼먹은 것이다. 대신에 일본인 한 무리가 우리 콜렉티보에 타고 있는데도 나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대체 파악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왜 처음보는 이 일본인 무리들은 우리 대신 차를 타는 것일까. 그때 나서준 것은 우리와 오랜 시간 콜렉티보를 기다리던 캐나다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콜렉티보로 마구 밀고 들어오는 일본인 무리들을 가리키며, 이들은 자신들과 동행이 아니라고 강하게 직원에게 항의해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와 형 역시도 우리가 이 콜렉티보에 타야한다고 어필했다. 직원이 명단을 다시 확인해서 비로소 나와 형은 콜렉티보에 탑승할 수 있었고, 일본인 무리들은 밀려나 다른 차량을 기다리게 되었다.

캐나다 친구들은 우리를 반기며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우리도 고맙다고 그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금세 피곤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차 안에 있는 모두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콜렉티보를 타고 마추픽추를 가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었다. 낮에 이동할 때에도 울퉁불퉁한 길에 차가 위태로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밤에 운전기사가 속력을 내며 운전을 할 때에는 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가끔씩 잠에서 깨어 차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시 마추픽추를 가야할 때가 생긴다면, 그때는 꼭 열차를 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약속 시간을 어기는 것까지야 참을 수 있지만, 목숨을 거는 질주는 너무 위험한 일 아닌가. 그런 생각들도 지쳐버린 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보다. 차는 기절한 모두를 싣고 위태롭게 쿠스코를 향하고 있었다.

 

18.

잠시 차가 어느 언덕 위 휴게소에 멈춰 섰다. 늦은 저녁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내리자마자 사람들은 토스트 같은 것을 파는 가게로 들어섰다. 그리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도 얼마 없었을 뿐더러, 지친 몸에 굶주리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아 토스트를 사양했다. 가게에 들어서서 콜라를 사고 담배도 한 갑 샀다. 그리고 가게를 나와 형과 담배를 한 대 태웠다. 조용히 가게 마당 구석에서 피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급하게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컴컴한 화장실 안에서 뛰어 나오는 사람은 아까의 그 캐나다 친구였다.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담배 한 모금만 피울 수 있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러라고 하고 담배를 건넸다. 금방 한 모금을 마시더니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출발하려는 콜렉티보에 몸을 실었다. 나와 형은 서로 무슨 일이람, 어깨를 으쓱거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정말 저 친구는 참 웃긴 친구야. 갑자기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 저 친구와 담배를 나누어 필 줄이야.

 

 

나중에 쿠스코에 돌아왔을 때도, 형과 나는 가끔씩 그 엉뚱 맞은 친구를 떠올리곤 했다. 참으로 특이한 여행,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더 기억이 선명하다. 벌써 오래된 기억들이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남아있을 수가 없다. 여행이 원체 그렇잖니. 형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맞다. 여행이란 원체 그런 거지. 다시 기절하듯 잠든 콜렉티보는 어느새 쿠스코로 들어섰고, 우리는 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다시 기절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여행이다. 아직 우리는 반걸음도 못 뗐고,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 그러니 기운을 잘 차려놔야 한다. 원래 이런 여행이란, 이처럼 많은 기운을 필요로 하곤 한다. 도시가 아주 깊게 잠들었다. 고요하게 잠든 도시에도 다시 아침이 밝을 것이란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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