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 에세이> 어린이와 소파 방정환

해마다 5월이 오면 소파(小波) 방정환(1899~1931) 선생이 생각난다. 어린이 운동가로, 인권운동가로, 독립운동가로, 선구적 언론인으로, 아동문학가로 일생을 어린이를 위해 몸 바쳤던 분이다.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널리 쓰게 한 분이기도 하다.

 

▲ 아차산 서울둘레길을 걷고 있는 등산객들

☞소파가 중심이 된 색동회

소파는 짧은 33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했지만 남긴 업적은 위대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고, 1923년 5월 1일에는 처음으로 ‘어린이날’을 만들어 행사를 치렀다. 색동회는 방정환이 주축이 되어 1923년 3월 16일 발족, 5월 1일 일본 동경에서 창립했다. 그 당시 나라 사정은 매우 어두웠다. 3·1운동을 겪고 난 뒤라 모든 게 위축돼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몇 젊은이들이 모여 색동회라는 모임을 만든 건 대단한 용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정환은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윤극영· 최진순· 마해송· 윤석중· 정인섭 등 뜻을 같이 한 분들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문화운동 및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방정환이 세상을 뜨고 난 뒤에도 색동회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비석 옆에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 쓴 글이 새겨져 있다.
▲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소파 방정환 동상

 

1957년엔 ‘어린이헌장’ 제정 선포에 앞장섰으며 1971년 7월엔 남산에 방정환 동상을 건립했고, 1975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 후로도 전국어머니동화구연대회와 전국어린이동화구연대회, 색동회상 제정, 눈솔상 제정, 레고상 제정, 전국시낭송대회, 전국교사동화구연대회, 청소년시낭송대회, 우리이야기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색동회는 지금도 하나의 어엿한 단체로 어린이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때의 오롯한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 1957년 5월에 제정 선포한 _대한민국 어린이헌장_(어린이대공원)

☞소파의 어린이 사랑

색동회 창립은 그 후 어린이날을 제정하는데 기폭제가 됐다. 1923년 5월 1일은 어린이가 비로소 세상의 어엿한 일원으로 우뚝 서는 날이었다. 소파가 어린이 운동에 발 벗고 나섰던 때는 일제의 압박이 거셌던 시기였다. 소파는 주변 친구들과 뜻을 모아 ‘청년구락부’라는 모임을 만들어 독립의 희망을 키워 나갔다. 나라의 미래요, 주인이요, 희망인 어린이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헌신적인 사랑을 쏟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집안의 손아랫사람이며 자녀들에게도 존댓말을 쓴 것은 어린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지를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어린이를 하나의 귀한 인격체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어린이날은 어른과 어린이들의 희망이었고 기쁨이었다. 어린이날이 5월 5일이 된 건 8.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다.

 

▲ 소파가 어린이운동을 펼쳤던 천도교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운동가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사위로 일찍이 천도교에 입문한 방정환은 1921년 1월 소춘 김기전, 현파 박래홍 선생을 중심으로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킨다. 이때부터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사랑하고 도와갑시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어린이운동에 더욱 매진하게 되는데 천도교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 소재)과 인근에 있는 승동교회는 그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 서 있는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기념비
▲ 소파의 자취가 어린 승동교회(종로구 인사동)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방정환의 어린이운동 말고도 김구 선생이 임정귀국 연설(1945년)을 했던 장소였고 3·1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붉은 벽돌과 육중한 화강암으로 지은 천도교중앙대교당 앞에는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라고 쓰인 기념비와 그가 어린이를 위해 직접 쓴 글귀가 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

☞아동문학의 요람이 된 ‘어린이’잡지

소파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를 펴냄으로써 어린이들의 정서 함양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어린이’는 색동회 동인들이 중심이 된 잡지였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요, 동시, 동화를 위주로 내용을 꾸며 큰 사랑을 받았다. 동요 ‘고향의 봄’, 동시 ‘까치까치 설날’, 동화 ‘호랑이와 곶감’ 같은 작품들이 인기를 끌면서 아동문학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를 비롯하여 <눈 오는 북쪽나라 아라사의 어린이> 같은 외국 동화와 동화극 <노래주머니>(1막 3장) 등 흥미를 주는 읽을거리들을 싣기도 했다. 잡지 인기에 힘입어 이른바 스타 작가들도 탄생했다. 고한승, 윤극영, 이원수 같은 1세대 아동작가가 그들이다. 일제의 심한 탄압으로 폐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복간돼 꾸준한 관심을 모았다. 종이가 귀하고 검열이 까다롭던 시절, 잡지 발행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 방정환이 지은 '옛날학교 이야기'


소파는 잡지 창간에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발행인이 된 건 제31호(1925.9)부터였다. 창간호의 발행인은 천도교 청년운동에 앞장섰던 김옥빈 선생이었다. 잡지의 판형은 B6(4·6판)으로 1934년 7월호까지 통권 122호를 발행했다. 이 후 정간과 복간을 거듭하다 1949년 12월호까지 15호를 더하여 총 137호를 발행했다.

 

▲ 육당 최남선이 펴낸 '소년'

 

소파의 잡지 창간은 육당(六堂) 최남선의 영향이 컸다. 육당이 펴낸 여러 소년잡지를 읽으면서 자란 세대였기 때문이다. 육당이 밑돌을 놓은 ‘소년문학’을 한 단계 승화시킨 것이 ‘어린이’였다. 그는 이미 동경유학 시절에 세계명작 동화 중 어린이에게 꿈을 키워 줄 10편을 직접 골라 <사랑의 선물>이라는 동화집을 펴냈으며 어린이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동화와 시도 직접 썼다. 읽을거리에 굶주리던 어린이들에게 세계명작동화는 큰 선물이었다. 소파가 동요· 동화· 동극 등 아동문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건 <어린이>를 세상에 내놓으면서부터였다. 그는 10여 년간 어린이 운동에 힘쓰면서 <만년 사쓰> <가을 밤> <귀뚜라미> <천사> <마음의 꽃> <농부와 굴뚝새> <흘러간 삼남매>등 많은 동요와 동화를 발표했다. <신여성, 1924.6>에 발표한 <어린이 예찬>은 그의 대표적인 수필로 꼽힌다. 펴낸 책으로는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비롯해 <소파전집> <방정환아동문학독본> <소파아동문학전집>등이 있다.

 

▲ 소파가 세계명작 동화를 모아 펴낸 '사랑의 선물'
▲ 소파의 대표작인 '만년사쓰'는 꾸준한 사랑을 받고있다.

 

소파가 쓴 <처음에>라는 ‘어린이’ 잡지 창간사를 보자.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도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고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노는 모양 고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고대로가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어른들과 같은 욕심도 있지 아니하고 욕심스런 계획도 있지 아니합니다.

죄 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사람이 모두, 이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위하는 생각에서 넘쳐 나오는 모든 깨끗한 것을 거두어 모아 내는 것이 이 《어린이》입니다.〈하략〉”

 

▲ 한강이 바라보이는 아차산

☞33세에 세상을 떠난 소파 방정환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소파는 보성전문학교를 나왔다. 그가 태어나 살던 당주동 길가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 나신 곳’ 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온양 방씨 가문의 4대 장손으로 태어난 소파는 위로 2살 위인 누나가 있었다. 당시 그의 집안은 서울 시장거리에서 곡물, 어물전으로 장사를 해서 아주 유복했다. 소파는 만 세 살에 천자문을 줄줄 읽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다고 한다. 1931년 7월 23일 과로로 쓰러져 요절할 때까지 그는 어린이들을 ‘섬긴’ 진정한 어린이 운동가였다. 어린이대공원(서울시 성동구 능동)에 가면 그의 동상을 볼 수 있으며 그의 묘소는 망우리(서울시 중랑구) 아차산 기슭에 있다.

 

▲ 종로구 당주동은 소파가 태어난 곳이다.
▲ 방정환 동상 앞에 세워놓은 '어린 동무들에게' 비석
▲ 방정환이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이 인상적이다.

 

소파 방정환의 묘는 양지바른 곳에 묻혀 있다. 묘소 정면으로 한강이 보일만큼 전망이 좋다. 자연석으로 된 무덤 상석 위 비석에는 앞면에 ‘동심여선(童心如仙)’, 뒷면에 ‘동무들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소파의 묘가 이곳으로 온건 1936년의 일이다. 그 전엔 홍제동 화장장 납골당에 봉안돼 있었다. 묘소 앞 연보비(年譜碑)에는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살펴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 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라고 쓰여 있다. 방정환이 ‘어린이날의 약속’에서 한 말이다.

 

▲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소파 묘소
▲ 소파 묘소 앞에 세워놓은 연보비
▲ 소파 무덤 비석에 새겨진 '동심여선'

 

소파가 어린이를 얼마나 극진하게 대했는지는 ‘어린이 예찬’에서 잘 읽을 수 있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라고 어린이의 자는 얼굴을 묘사했다. 가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평화로운 얼굴은 바로 잠자는 아기 얼굴일 터이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의 얼굴은 세상은 그래도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일깨워준다.

소파가 심어놓은 어린이 사랑, 어린이 운동은 오랜 세월 세상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어린이가 있는 한 그는 그들의 영원한 우상으로 살아 있을 것이다.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소파 방정환이 남긴 유언이다.

 

▲ 만해 한용운과 그의 부인이 나란히 잠들어 있다.

☞역사 인물들이 잠든 곳

망우리 묘원에는 소파 말고도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잠들어 있다. 이른바 ‘사색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위창 오세창, 만해 한용운, 소설가 계용묵, 설산 장덕수, 화가 이중섭, 작곡가 채동선, 순조의 맏딸 명온공주, 가수 차중락, 야구선수 이영민, 시인 박인환, 의사 지석영 등 다양한 모습의 묘들을 만나게 된다. 묘소 앞에는 친절하게 망자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는 연보비가 서 있다.

독립지사이자 스님으로 시인으로 살다간 만해 한용운 묘소로 가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해의 묘 옆에는 또 다른 묘가 있다. ‘만해한용운선생묘 부인유씨재우(夫人兪氏在右)’라고 쓰여 있는 걸로 보아 만해의 오른쪽이 부인의 묘다. 조선총독에게 “대처승을 허해 달라”고 ‘건백서’를 보냈던 만해는 혼자 살다 쉰다섯 살 때 신도의 소개로 유숙원과 결혼했다고 한다.

망우공원은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선정됐다.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에서는 시민이 선정한 ‘꼭 지켜야할 자연문화유산 6곳’ 중 하나로 지정하기도 했다. 무섭고 으스스했던 곳이 우리 근현대 역사문화의 산실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망우공원 길은 산책로 구실을 톡톡히 한다. 망우공원을 지나 용마산에서 아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코스는 서울 둘레길 157㎞ 중 가장 경치가 좋은 코스로 알려져 있다.

▶망우리공원 가는 길=대중교통: 201번, 262번, 270번, 2234번, 3번, 8번, 8-2번, 30번, 51번, 65번, 165번, 166-1번, 167번, 202번, 330-1번, 765번, 1330번, 1330-1, 1330-3번, 1330-44번, 8004번, 8005번 버스를 타고 망우리고개 입구 동부제일병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망우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된다. 중앙선 양원역 2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20분정도 걷거나 지하철 7호선 상봉역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다. 자가 운전: 망우리고개 중간의 망우저류조공원 주변이나 망우산 중턱의 망우묘지관리사무소(02-434-3337) 옆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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