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여백

토끼 두 마리 안고 떠난 더부살이

<연재> 온갖 역경 딛고 꿈 이룬 가수 김덕희 스토리 김덕희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8.05.08 11:07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김덕희

이 글은 경기도 안성 당직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무렵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더부살이를 시작, 결국 가수로서 꿈을 이룬 김덕희가 쓰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다. 김덕희는 이후 이발소 보조, 양복점 등을 전전하며 오로지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 서울에서 장갑공장 노동자, 양복점 보조 등 어려운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초·중·고 검정고시에 도전, 결실을 이뤘고 이후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수 도전장을 내밀었고 결국 성공을 거뒀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송창식의 ‘왜불러’,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을 들으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꿈을 이뤘다는 것이 너무 행복할 뿐입니다.”

<위클리서울>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연재를 허락한 김덕희가 직접 쓰는 자신의 어려웠던 삶,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얘기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그리고 모든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설날이 됐다. 양력으론 2월 어느날 쯤 됐을 게다. 해마다 그랬듯 명절만 되면 난 항상 더 외로움을 느껴야했다. 당직골의 다른 집들은 서울 등 도시에 나간 사람들이 전부 돌아와 시끌벅적했는데 우리집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설날 아침, 우리 집을 찾아오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때문에 흰떡국 한 그릇 못먹고 설날 아침을 보내야 했다. 친척들은 전부 외지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장손이라 집안의 제사를 모셔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못되자 서울에 사시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오래 전부터 제사를 모셔왔다.

가끔은 명절이 되면 아버지 손을 잡고 서울에 사시는 작은 집에 가서 명절을 보내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설날은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서울에 가려면 차비 등 경비가 꽤 드는데 돈이 떨어졌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하루종일 집안에서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시며 누워 계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나마 동네 아이들이 아버지께 세배를 드리려 몰려오긴 했지만 아버지께선 몸이 아파서 세배를 받을 수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세뱃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떡국도 먹지 못한 채 난 한 살을 더 먹었다. 내 나이 이제 열 한 살이 된 것이다.

11살까지 살면서도 그렇게 춥고 배고팠던 겨울은 없었다. 그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겨울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새 봄이 오면 나는 당연히 한 학년을 진급해야 했다. 7살에 입학을 했으니 이제 5학년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사정이 더 이상 학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난 결심을 했다.

"이제 아버지 곁을 떠날 때가 됐다."

오랫동안의 굶주림이 원인이었다. 날이 갈수록 병환이 심해지는 아버지의 몸 상태도 원인이었다. 이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쌀은 떨어지고, 돈도 없고…. 이대로라면 나까지도 굶어죽기 십상인 일이었다. 내 끼니라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때마침 일을 거들어주며 함께 살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사진=pixabay.com

 

당직골에서 충북 음성쪽으로 산 하나를 넘으면 `덜리기`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서도 제일 잘 사는 부잣집에서 더부살이 할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더부살이를 하면 당연히 하루 세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얀 쌀밥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하얀 쌀밥, 아니 보리가 잔뜩 섞인 밥이라도 먹여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운만 좋으면 쌀을 얻어서 아버지 식사도 챙겨드릴 수 있을 것이었다. 난 며칠밤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결심했다. 아버지 곁을 떠난다는 게 걸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아버지 몰래 집을 나왔다. 그리고 그동안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 두 마리를 조그마한 자루에 담아 안고 산을 넘어 덜리기 마을의 부잣집을 찾아 떠났다.

나는 토끼를 무척 좋아했다. 학교에 갔다오면 토끼밥을 주기 위해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면서 내 먹을 양식은 없었지만 토끼까지 굶기면 안된다는 생각에 몇 달 전부터 겨울에 먹일 풀들을 뜯어 말려놓기까지 했다. 토끼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컸다.

그런데 그런 토끼를 집에 그냥 놔두고 오면 아버지께선 분명 굶겨 죽일게 뻔했다.

마침내 덜리기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물어 물어서 더부살이를 구한다는 그 부잣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당직골에선 구경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대문도 높다랗기만 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 종일 머뭇거리며 집 근처를 배회했다. 날이 어두워졌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긴 죽기 보다 싫었다.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다가 토끼를 안은 채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왠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집 안에서 나왔다. 날 발견한 그 사람은 내가 그 마을에서 본 적이 없는 아이란 걸 알고는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왜 여기에 있냐…집은 어디냐…" 등등의 질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저 토끼를 꼭 껴안은 채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어떤 중년의 남자와 아주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중년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그 남자의 부모님이었고 그 집주인이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뉴텍미디어그룹  |  등록번호 : 서울다07108  |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발행인 겸 편집인 : 정서룡  |  발행소 : 서울시 종로구 난계로 29길 27(숭인동) 동광 B/D 2층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광고국장 : 황석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Copyright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  master@weekly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