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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네거리에 피 뿌릴 것 원했던 전봉준, 123년 지나서야 동상으로 현화해”

<심층인터뷰> ‘동학농민혁명 124주년’ 이이화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2회 한성욱 선임기자lse3399@weeklyseoul.netl승인2018.05.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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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에서 이어집니다.> 

▲ 이이화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

 

- 민중들의 저항이 거셌다.

▲ 1897년 갑오개혁 이후 외세물결이 급격해지자, 만민공동회와 수만 명 민중들의 저항운동과 함성이 날이 갈수록 커졌다. 고종이 있는 경운궁으로 몰려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광화문과 종각, 시청에서 집회를 했는데, 광화문 육조거리는 시위의 중심지였다. 시청은 길이 좁았고 ‘황토현’이라는 작은 언덕길을 넘어가야 했다. 종각에서 남대문 길로 빠져야 시청으로 갈 수 있었다. 오늘날도 광화문과 종각, 시청 세 곳은 민중의 집회장소다. 만민공동회가 광화문에서 외세반대 집회를 주도했을 때,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군의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살상이 있었다. 당시 국가중죄인을 관할하던 의금부(義禁府)와 전옥서(典獄署), 좌포도청, 우포도청 등 관청의 규모는 지금의 광화문 동화면세점부터 종로 3가 단성사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었다. 나중에 일제가 이 일대를 정비해 서대문형무소로 옮겼다. 여기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순국했고, 전봉준을 비롯한 핵심동학군 4명은 종각에 있던 전옥서(典獄署)에서 순국했다. 특별한 의미가 서려 있는 자리다.

 

- 여전히 우리 가슴 속에 살아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그는 어떤 인물인가.

▲ 조선 말기는 서당에서 공자와 맹자를 가르치던 때다. 전봉준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농촌지식인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실학정신과 개혁성향이 강했다. 조선의 모순을 철폐하려 세운 집강소는 농민자치기구이자 ‘개혁의 산실’이었다. 특히 민주-평등운동을 기반으로 했고 양반과 노비, 지주와 소작인의 차별을 없앴다. 전봉준은 전북 고창과 정읍 일대에서 개혁세력을 일굴 정도로 정치적 역량도 갖춘 사람이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날 시기의 조선은 부정부패와 농민수탈, 패덕과 잔혹함이 난무했다. 그는 일본이 장차 조선을 침략할 것을 미리 알았다. 일본과 서구열강을 경계했지만, 조정대신들은 일신영욕에 빠져 군부를 협잡하고 민중을 속였다. 일본군과 결탁해 무고한 백성을 해하려는 흉계를 꿰뚫어 보았다. 간교한 일본도 전봉준이라는 인물을 경계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끼리 서로 피터지게 싸우게 만들고, 국력을 소진시킨 뒤에 국권을 찬탈하려는 야욕을 그가 감지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의 혁명적 이상을 두려워한 일본은 동학군 소탕과 미래의 독립군의 씨를 말리려는 전략을 서서히 드러냈다. 

 

- 그가 봉기한 이유는.

▲ 전봉준이 가진 재산은 논 서마지기가 전부였다. 그는 일본과 조정의 수탈대상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농민혁명을 이끈 바탕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정이 있었다. 나중에 체포된 뒤 재판장이 ‘수탈도 없었는데 봉기한 이유’를 묻는 말에 ‘백성의 원망과 탄식이 하늘을 찌르는 원인을 없애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민중봉기의 원인은 가혹한 폭정과 외세 때문이다. 전봉준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세웠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결의를 가지고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외세에 의연히 맞섰다. 전투 중에도 그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고 할 만큼 애민사상이 깊었다. 농민군에게 ‘충효로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위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 ‘혁명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 전봉준은 ‘혁명의 마무리’를 서울에서 하려 했다. 1894년 2월 고부민중항쟁 때도 전주감영을 깨부수고 서울로 곧장 올라갈 생각이었다. 그런 그에게 혁명의 명분을 준 사건이 터졌다. 7월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 점령한 사건이 있었고, 이어서 청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그는 즉각 일본의 침략을 국가위기로 규정했다. 그해 10월에 농민군을 전국적으로 규합해 싸움에서 승리를 거듭했다. 공주를 지나 서울입성을 재차 시도했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 등 일본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연패하는 바람에 입성이 불투명해졌다. 하늘의 뜻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결국 1894년 12월 2일 부하의 밀고로 순창에서 체포됐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지금의 남산 밑 진고개의 일본영사관 순사청(현 을지로 중부경찰서)에 투옥됐다. 당시 남산일대는 일본인과 일본영사관, 영사경찰이 있던 관청자리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군 수뇌부 등은 전봉준 등 지도자들을 국사범으로 다뤘다. 당시 개화정부의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전봉준을 의금부가 아닌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로 이관해 재판을 했다.

 

- 죄명이 무엇이었나.

▲ 조선말기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그의 죄목은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門者不待時斬)으로 꽤 길다. 이 말은 ‘군복차림에 말을 타고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일으킨 자는 즉시 처형하는 죄’를 말한다. 전봉준과 사형언도를 같이 받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4명은 판결을 받은 새벽에 좌포도청 감옥에서 곧 바로 교수형을 당했다. 5명이 교수형을 받은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역적죄인은 목을 잘라 관아 앞에 걸어놓거나, 사람들이 보도록 조리를 돌렸다. 이를 효수경중(梟首警衆)이라 한다. 한양에서는 중죄인을 죽일 때, 주로 군중이 많은 서소문이나 동대문 언저리의 수구문 밖에서 참형을 했다. 잘린 머리를 지방으로 순회시켜 백성을 겁박하고 엄포를 놓았다. 이런 효수형이 너무 참혹해 갑오개혁 때 폐지했다. 사형수에게 근대적 인권을 적용해 전봉준을 비롯한 5명에게 처음으로 교수형을 내렸다.

 

- 처형은 언제 당했나.

▲ 재판장은 법무대신 서광범이었는데 재판 때마다 일본영사가 배석했다. 1895년 2월 9일 1차 심문이 있었는데, 전봉준은 고문 때문에 걷지를 못해 짚둥우리에 누운 채 법정에 들어갔다. 재판관은 전봉준에게 ‘반란군 동도(東盜)들을 모아 관아를 함락해 무기와 군량을 찬탈했고 아전살해와 세금착복,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토지분배로 국법을 문란케 한 대역불궤(大逆不軌)의 죄인’이라 취문했다. 재판관 장박은 고부 1차 봉기와 무장봉기 등을 캐물었다. 흥선대원군과의 연관설과 농민군 규모 등 한 달 동안 6차례 신문을 했다. 일본영사는 275개항을 질문했다. 전봉준은 당당하게 대답했고, 중대한 질문에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전봉준은 1895년 4월 23일 임시 권설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은 다음날 24일 새벽 2시에 집행했는데 불과 몇 시간 사이였다. 마지막 유언에서 그는 ‘일본군과 간악한 관리를 몰아내고, 쓸 만한 선비를 내세워 국정을 맡기고 낙향해 농민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로네거리에 피를 뿌릴 것을 원했던 전봉준의 뜻은 123년이 지나 순국일인 2018년 4월24일 우리 앞에 동상으로 다시 현화(現化)했다.

 

- 사형을 급히 서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숨은 음모가 있었다. 당시 개화파 정부는 모든 ‘재판과 소송을 2심’으로 하는 형법을 개정하고 4월부터 시행령을 공포했다. 전 장군과 4명은 시행을 이틀 앞두고 사형을 당했다. 그렇게 해서 들끓는 민심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체포된 나머지 100여 명의 동학군은 죄목에 따라 무죄나 곤장, 태형, 유배형 등 비교적 가볍게 처벌해 민중을 달래려 했다. 장흥전투의 이방언 장군과 김방서 등도 무죄로 풀려났다. 고창에서 활약했던 홍낙관은 곤장에 유배형을, 북접 지도자 황하일은 태형 100대에 유배형을 받았다.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이것은 일본과 개화정부의 책략이었다. 핵심주범 5명만 사형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방면시켜 은전을 베푼 것처럼 보이려 했다. 향후에 다시 일어날지 모를 농민운동 약화를 위한 기만전략이 깔려 있었다.

 

▲ 전봉준 장군 좌상

 

- 와해된 동학군에 대한 유림(儒林)의 보복이 극에 달했다고 하는데.

▲ 일본군에 의해 동학군이 완전 진압되자, 증오심을 품었던 유림들과 아전들이 보복을 위해 합세했다. 이들의 복수심은 극에 달했다. 혼란했던 세상이 다시 뒤집히자, 양반-상놈 철폐와 지주-소작제 폐지에 반기를 들었던 농민군들을 처단하러 나섰다. 당시 유림들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가 동학군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국가반역죄로 몰거나 비도(匪徒) 또는 동비(東匪)라는 이름으로 모두 색출해 학살했다. 방법도 아주 잔인했다. 구덩이에 사람을 산채로 생매장 하거나 강물에 빠트려 죽이고 우물에 던지거나 임신부를 대나무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등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총살하면 좋았지만, 당시 총알 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비정상적 학살은 계속됐다. 붙잡힌 동학군은 머리 정수리에 불을 붙인 관솔(송진이 있는 소나무 가지)을 뾰족하게 깎아 박아 죽였다. 관솔나무는 송진이 있어 불에 잘 타고 꺼지지 않아 뇌를 타고 내려가다 두개골이 터져 죽는다. 잡혀온 아녀자들은 독사뱀을 음부 속에 강제로 밀어 넣어 죽이기도 했다.

 

- 전봉준 동상 건립 계기는.

▲ 전봉준 장군은 고향이 호남이지만, 서울에서 순국했다. 그런 서울에 전봉준과 동학혁명을 기리는 역사적 유물이나 자료가 전혀 없다. 역사학자로서 전봉준 장군에 대한 학술연구와 시민운동을 해왔지만, ‘그동안 도대체 뭐 했나? 입으로만 떠들었지 한 게 없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다행히 1994년 동학혁명 100주년 전국행사가 있었고, 전주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발족됐다. 서울의 동학혁명100주년기념사업회와 동학혁명유족회, 전봉준재단 등이 속속 발족되는 등 전국적으로 ‘동학바람’이 다시 일었다. 한승헌 전 감사원장도 전주에서 동학혁명사업회를 발족해 시민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04년에 출범하면서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이 본격화 됐다. 그때부터 매일같이 뜻 맞는 사람들을 만나 동상건립을 주장했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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