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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명운 가를 위중한 문제, 동학혁명 본질 꿰뚫어서 주도적으로 풀어가야”

<심층인터뷰> ‘동학농민혁명 124주년’ 이이화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3회 한성욱 선임기자lse3399@weeklyseoul.netl승인2018.05.1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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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에서 이어집니다.> 

▲ 이이화 전봉준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

 

- 당시는 수구정권 때였는데.

▲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던 시기에 때마침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됐다.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동상건립 조사를 위해 남산과 효창공원, 시내공원 등을 모두 답사하기 시작했다. 그전에 오세훈 시장이 광화문에 세종대왕 동상을 설치했던 전례도 있었기 때문에, 가끔 모임에서 박 시장과 만나 ‘서울에 전봉준장군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면, 박 시장도 ‘합시다’라고 호기 있게 답했다. 한번은 2016년 8월에 박 시장이 전주에서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지역인사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모인 각 대표들이 ‘서울에서 전봉준 장군동상을 세우려 하는데 시장님도 동참해 달라’는 제의를 했다. 그때서야 박 시장은 내가 한 말이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정식으로 건의를 받아 들였다.

 

- 위원회 설립과 모금이 쉽지 않았을 텐데.

▲ 지난해 3월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를 발족한 후, 관계자들만 참여시키고 나는 빠졌다. 나이도 있고 젊은 후진들을 위해 용퇴하려 했다. ‘강만길이나 한승헌 대표를 추대하라’며 발을 뺐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없다. 동상건립은 이이화 선생님이 적격’이라며 손사래 치며 모두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내가 동상건립추진위원회 이사장에 추대됐다. 박 시장이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별도로 2000만 원의 개인성금을 모았고, 국민모금운동도 나섰다. 3억 원이 목표였다. 쉽지 않았다. 천안 전 씨 문중에서 모금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러다 중도에서 끝나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모금이 쉽지 않았고 모임에 나가면 서류를 내밀고 기부금을 부탁하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의외로 기금이 빨리 조성됐다. 특히 정읍시의회에서 수백만 원이 들어왔고, 고창군에서 ‘녹두(綠豆)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1000만원이었다. 지난 4월 24일 동상제막식에도 1000만 원의 부대경비가 들어갔다. 박 시장이 서울시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것도 마다했다. 대신 동상이 들어설 종각역 부근 소공원 자리의 도로정비 등의 도움을 주었다. 흙무더기와 자갈, 보도블록 등 정비 공사를 해준 것이다. 구청경비로 약 2000만 원 정도가 들었으니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면서 서울시와 기업체, 기관으로부터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래야 시민의 힘으로 동상을 떳떳하게 세웠다는 자부심을 후세대들이 가질 것 아닌가.

 

- ‘전봉준과 박정희’ 동상 심의 문제가 맞붙었다.

▲ 동상을 설치하려면 서울시의 공공미술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 이 위원회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지만, 도심지에 동상설치와 역사적 고증을 심의하는 기관이다. 심사도 과거와 달리 매우 까다롭다. 옛날에는 연고가 없는 지역에 마구잡이로 동상을 설치했지만, 지금은 동상인물과 역사성을 깊게 따진다. 전봉준 장군 동상심의도 최초지만, 허가를 받기 위해 한국학과 국사관련 유관기관들의 역사적 고증과 인증을 받아야 했다. 결국 각 기관들로부터 인증서를 받아내 심의에서 통과됐다. 반면에 광화문 광장에 설치하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 동상 심의는 탈락해 지금은 상암동에 안치된 상태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박 대통령 동상을 반대했고 지역주민들의 반발도 거셌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 입지와 작품성도 중요할 텐데.

▲ 그렇게 해서 동상 입지의 타당성 조사를 해보니, 광화문은 육조거리 조성사업이 진행 중이라 어려운 상황이었다. 종각은 전봉준 장군이 사형을 당했던 옛 전옥서(영풍문고 앞) 자리다. 영풍문고는 지금은 개인 사유지(私有地)라 허가가 안 된다. 다행히 종각역 5, 6번 출구 중간의 땅이 서울시 시유지여서 동상을 세울 공간이 충분했다. 건립을 위해 서울시와 시의회의 법적 통과가 필요했다. 시예산도 관건이었다. 시장 마음대로 돈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법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가장 신경 쓰였던 점은 상투를 튼 모습의 전봉준의 얼굴표정이었다. 1890년대는 상투를 틀면 반드시 머리에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걸쳐야 하는 의관(衣冠)문화가 지배했기 때문에 그런 원칙에 위배된다는 의견이 많았다. 상투 모습 자체를 비난하기도 했다. 상투와 갓을 쓴 동상 모습에서 선비냄새가 너무 나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일반 동상처럼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모습은 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었다.

 

 

 

- 동상의 눈빛이 강렬한데.

▲ 여하튼 작가들의 평가는 달랐다. 오히려 작품성과 예술성면에서 높게 판단했다. 키가 녹두처럼 작아 ‘녹두장군’으로도 불렸던 전봉준 장군의 인상은 살이 희고 눈이 매서운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모진 고문으로 얼굴엔 부기가 있었고,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본래의 모습인 앉은 상태에서 전면을 바라보는 형태로 정했다. 부기 있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면 특유의 저항감이 떨어진다. 할 수 없이 골상학적으로 얼굴 살을 좀 뺐다. 골상학적으로 얼굴 살을 빼도 제작원칙에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했다. 살을 빼니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나 전봉준 이미지를 잘 살렸다는 평이다. 어떤 사람은 강렬한 눈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지적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평판은 대체적으로 좋다.

 

- 124년 전과 오늘날의 정세 어떤가.

▲ 그때나 지금이나 자주(自主)가 없다. 주인은 있으되 남에게 안방을 내준 꼴이다. 평등과 자주를 외쳤던 동학혁명과 3.1운동, 4.19혁명, 6월항쟁, 5.18광주항쟁을 5대 근대혁명운동으로 부른다. 촛불시민혁명의 뿌리도 동학정신이다. 이런 원동력이 대한민국을 지배해왔던 이명박-박근혜 등 수구세력들을 몰아냈다. 2017년 문재인 촛불정부가 들어서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있고, 남북경협과 민간교류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주한미군이 상주하며 지배하고 있는 나라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먼저 도망간 이승만은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통째로 상납했다. 국방을 다른 나라에 내맡겼다. 휴전반대운동을 하면서도 협정대표단은 보내지 않았다. 휴전협정은 북한과 미국 주도하에 체결됐다. 한국은 지금도 작전권이 없고 정전협정의 당사국도 아니다. 외세와 결탁한 지배세력은 경제를 장악했고, 한반도 안보마저 반통일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 남북정상회담이 통일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자주적 평화통일 가능할까.

▲ 북한에는 외국군대가 없지만,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촛불정신을 이은 문재인 정부가 ‘운전자론’을 추진해왔고,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말한 이론들이 점점 실현돼가는 것 같다. 한때 젊은 층들이 이들에 대해 비난과 욕설을 퍼부어 댔고, ‘빨갱이’니 ‘좌파’라 매도했었다. 하지만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보면, 미리 계획된 측면도 보이지만 미국 등 외세보다 우리도 주도적으로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여실하게 보여줬다. 문재인 정부가 다행히 지금까지 잘하고 있다. 문재인, 김정은 두 정상을 보면 자주적으로 하려는 느낌이 강해 보인다. 예측하기 힘든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잘 부추겨서 이번에야 말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주한미군철수가 논의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다. 한?미군사훈련도 폐지되어야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 그것이 통일로 가는 첫 걸음이다.

 

- 북·미 간 평화협정 전망은.

▲ 가능성이 많다. 왜냐면 미군이 유엔결의에 의해 한국에 주둔했지만,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었다. 이런 근거로 미군이 주둔했고, 국제법적인 질서보다 자국 이익을 위해 영원히 남으려는 주한미군 배치도 문제다. 유럽 나토군에도 미군이 개입해 있지만, 어쨌든 미군철수를 주장해야 한다. 미국은 과거에 일본 오키나와 방어선을 확대시켜 미 태평양 방어선인 ‘애치슨라인’을 그었다. 한국은 방어선에서 제외됐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잘못 판단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지금도 오키나와 선을 확대시키고 남중국해와 필리핀 윗부분까지 넘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장차 태평양 방어선에 대한 전략적 수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쟁점이다. 평화협정에 있어서 최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이 북한과 비핵화협상을 조건으로 미군철수를 할지 안 할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을 가능성도 높다.

 

- ‘동학횃불’이 평등·자주를 외치고 민주화를 열망했던 점에서 오늘날과 같다. 후대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 우리가 아는 프랑스혁명은 초기부터 외세개입이 전혀 없었다. 자발적으로 민중들이 나서서 자유와 평등, 박애를 부르짖은 순수혁명이었다. 나중에 반혁명세력이 일어나면서 유럽 왕조 외세국가들이 개입해 탄압했지만 처음부터 외세는 없었다. 우리는 반대다. 개항 후부터 일본 등 외세의 개입이 일찌감치 시작됐고, 한반도는 열강들이 이권을 놓고 벌인 전쟁터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모두 우리 땅에서 일어났다. 올해 농민혁명 124년을 맞았지만, 요즘이나 그때나 변한 건 없다. 동학혁명은 봉건제 철폐와 외세배격 운동이었다. 동학혁명은 평등을 향한 혁명이었고 자주를 위한 혁명이었다. 2016년 촛불혁명도 독재수구세력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심판했다는 측면에서 평등과 자주다. 그럼에도 지금의 평등은 극과 극이다.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재벌과 정치인, 관료, 보수언론 등 반통일-수구세력들이 평등실현을 했는가. 오히려 빈부격차는 심해졌고,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이 OECD국가 중 가장 심각하다. 남북분단도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4대 강국의 책임이다. 이들이 다시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뒤에서 음계(陰計)를 획책하고 있다. 민족의 명운을 가를 위중한 문제를 강대국에게 맡기면 안 된다. ‘자주와 평등’이라는 동학혁명의 본질을 꿰뚫어서 주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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