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장흥 갯길 따라-감태밭에 새겨진 이력

▲ “바닥이 좋아. 모새도 없고 뻘이라 좋아. 긍께 여그 감태가 유명해.” 물때 따라 살아온 안정자 할매.

 

발자국이 움푹움푹 깊다. 오늘 오전 할매의 이력(履歷)이 거기 쓰여져 있다.

회진면 장산마을 앞 갯바닥. 푸릇푸릇한 실타래들이 갯벌을 뒤덮고 있다.

“항, 힘들제. 푹푹 빠지는 디서 맨몸도 아니고 다라이 끄꼬 댕길란께. 집에 가문 바로 주저앙거져불어. 그래도 할 때는 용을 쓰고 해.”

한 발 한 발 전진이 어려운 갯바닥에서의 고투. 박양심(78) 할매는 아침 여섯 시에 갯바닥에 들어 점심 때가 되도록 허리 한번 펼 새 없이 갯바닥을 훑고 다녔다.

“인자 감태는 끝물이제.”

겨울 갯벌을 허전하지 않게 했던 이 푸르름이 자취를 감출 때쯤이면 완연한 봄. 가늘고 푸른 가닥들은 한겨울 추위를 견딘 향과 맛을 품고 있다.

 

▲ “깨져불었는디 못 버려. 갯부닥에 가문 아직은 쓰겄다 하고 간직허제.” 터진 자리마다 살뜰히 꿰맨 감태 바구리.

 

“쌉싸름하니 상깃해. 요새 젊은 애기들은 잘 안 묵어. 요 맛을 몰라.”

사느라 바닥을 더트며 쓴맛 단맛 짠맛 매운맛 다 봐온 어른만이 알 수 있는 맛이다.

도시 사는 자식들한테 전해질 ‘고향의 맛’이기도 하다.

“한 바구리 채와지문 지절로 생각나, 자석들이 좋아헌께. 전에 택배 없던 시상은 어찌고 살았으까. 택배가 잘 나왔어.”

철철이 바리바리 싸보내는 택배 보따리는 어매에겐 ‘존재증명’과도 같은 것.

“너무 추와도 질러나들 않애. 너무 따땃해도 안되고. 비도 가끔썩 와줘야 쑥쑥 질러난디 요새 비가 토옹 안 왔어.”

 

▲ 고투의 흔적. 감태 몇 가닥이 할매의 손목에서 빛난다.

 

감태는 날씨나 온도에 예민하다. 또 오염된 갯벌에선 자라지 않는다.

“우리는 바닥이 좋아. 여그 감태가 유명해. 모새도 없고 뻘이라 좋아. 감태는 요라고 깨끗하고 쩍 없고 요라문 좋제. 여그 뻘에는 없는 것이 없어. 기 반지락 꼬막 낙지 다 있어. 우리는 바다에서 난 것으로 애기들 갈치고 논 사고 밭 사고. 요 바다가 없으문 안 되야.”

감태 맬라고 새복밥 묵고 나온 일동무가 또 있다. 한 동네 사는 안정자(78) 할매.

“우리는 물때 맞촤 살아. 요 물이 새복에 나문 물 따라 나올라고 깜깜해도 나와. 갯바닥에서 맨나 엎져서 일하고 다라이로 그놈 이고지고 욈겨오느라 여그 어매들은 삭신이 다 골벵 들었제.”

바닥에서 난 것들을 다라이에 이고 예전에는 대덕장에도 회진장에도 달음박질치며 살아온 할매들.

 

▲ 오늘 오전 할매의 이력(履歷)이 거기 쓰여져 있다.

 

“여그 바닥이 걸어서 여그 어매들은 고생이 많애, 일복이 많애.”

저 너메 덕흥리에서 시집왔다는 박양심 할매는 시집온 그날로부터 ‘뻘짓’을 배웠다.

“뻘짓거리가 여그서는 존 말이여, 하하. 여그는 뻘짓거리를 해야 사는 곳인께. 처음에 시집와서 갯바닥에 처음 나갈 때는 막 빠졌어. 스무 살에 시집와갖고 시방 칠십야닯인께 얼마나 오래 되얐소.”

그 세월 동안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사는 법을 깨쳤다.

“글도 여그는 보지란허문 사는 디여. 기 잡제 감태 하제 꼬막 잡제 보지란만 허문 건져.”

 

 

아롱이와 박양심 할매 주연

헤어짐과 만남의 드라마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개 한 마리. 그 시선 따라 함께 눈길을 뻗어보니 저어기 한 점처럼, 엎드린 할매가 있다.

망부석 같은 기다림. 아직은 맵찬 바람 속에 개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킨다.

이윽고 재회의 순간. 몇 시간 동안의 헤어짐이었지만 이리도 반갑고 애틋할까.

뻘에서 나오는 박양심 할매를 보자마자 개는 홀딱홀딱 뛰며 반색한다.

 

▲ 할매랑 함께 출퇴근한다. 박양심 할매가 엎드려 일하는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고 앉은 ‘아롱이’.

 

“아롱아, 혼차 얼매나 심심했냐.”

“손!”이란 말 한마디에도 ‘마음의 온도’가 실린다. 할매 손에 제 손을 낑낑 올려 포개는 아롱이. 둘은 한동안 눈을 맞춘다.

“우리 개는 징허게 영리해. 죽은 즈그 에미도 그러코 영리하더니 딱 에미를 탁했어.”

그 영리함의 목록 중 첫 번째는 “나 가는 디는 밭이든 갯부닥이든 어디든 기언치 따라와서 한하고 지달라.”

할매의 출퇴근길을 늘 함께 하는 동행인 것. ‘한하고’는 할매 입에서 그 긴긴 시간마냥 ‘한∼∼∼’ 하고 늘이빼진다.

 

▲ 이윽고 재회의 순간. 갯바닥에서 나온 할매와 아롱이는 손을 맞잡고 한동안 눈을 맞춘다.

 

“감태든 반지락이든 바구리에 누가 뽀짝대기만 해도 째깐헌 것이 이상 무섭게 짖어. 지킬라고 지는 애를 쓰는 것이제.”

자식 자랑하듯 아롱이 자랑이 줄줄이.

“뭣보다 기척이 있는 것이 좋제.”

혼자라면 그저 고적할 집. ‘인기척’이 아니어도, 할매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든든한 것이다. 아롱이가 거기 있어서.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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