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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남북정상회담을 누르다

<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이석원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8.05.1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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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7일. 한반도의 갈라진 허리 판문점에서 생중계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전 세계의 눈을 사로잡고 있을 때, 사실 스웨덴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뉴스를 살짝 누른 다른 뉴스가 있었다. 스웨덴의 전설적인 그룹 아바(ABBA)가 35년 만에 새 노래를 녹음하고 발표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그날 다겐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를 비롯해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Svenska Dagbladet), 아프톤블라데트(Aftonbladet) 등 주요 일간지는 물론, SVT와 TV4 등 주요 TV에서도 단연 톱뉴스는 ‘아바, 35년 만에 신곡 발표’였다.

 

 

물론 멀리 한반도로부터 들려오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회담과 이어진 판문점 선언이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북한의 대사관이 스톡홀름 시내에 떡하니 서 있고, 김정은에 대한 관심이 세계 어느 나라 젊은이들보다도 높은 스웨덴인지라, 게다가 당시만 해도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열릴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스톡홀름이 유력하게 거론되던 터라 당연히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역사적인 상황은 스웨덴 사람들에게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었다.

다만, 한국에서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이나 개헌 국민투표 연기 등을 뒤덮은 것이 남북정상회담이라면 그 남북정상회담 뉴스를 살짝 덮은 스웨덴 뉴스는 아바의 신곡 녹음 소식이었다.

아바가 2곡의 새로운 노래를 녹음하고, 그 중 한 곡을 올 12월 영국 BBC와 미국 NBC 특별 방송을 통해 공개할 것이라는 뉴스는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뉴스보다도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그것이 어디든 스웨덴 사람들은 아바의 신곡 소식을 얘기했고, 거리에서는 유난히도 아바의 노래들이 많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첫 뉴스가 나간 지 2주일이 넘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심지어 아바가 비공식적으로 해체한(아바는 공식적으로 해체한 적이 없다. 그저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을 뿐이다) 1983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조차도 아바 노래를 새삼 찾아들었다. 스웨덴 최대의 음원 사이트인 스포티파이(Spotify)에서도 아바의 음악은 상위권의 검색과다운로드 대상이었고, 시내 음반 가게에는 아바의 오래된 음반의 주문이 쇄도했다.

스웨덴 사람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은 채 외국 관광객들만 들끓던 스톡홀름 유르고덴 섬의 아바 박물관에는 평소 같지 않게 스웨덴 구경꾼이 몰렸다. 스웨덴의 대중문화 전문가들조차도 “스웨덴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놀랄 정도였다.

 

 

그럼 도대체 스웨덴 사람들에게 아바는 어떤 존재일까?

사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것’들은 꽤 많다. 하지만 스웨덴 시민들은 아바만큼 세계에 스웨덴의 이름을 알린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바는 스웨덴 사람들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1980년대 초에는 “칼 16세 구스타브 국왕보다 아바”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왕실보다 재산이 더 많다고 알려진 아바였는데, 국왕의 사치는 비판해도 아바의 호화생활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 정도로 아바는 스웨덴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지난 2009년 스톡홀름에 처음 아바 박물관을 세우려고 할 때 스톡홀름 시민들은 물론 스웨덴 사람 상당수가 아바 박물관에 거부감을 가졌다. 아바를 사랑하지만 굳이 살아있는 사람의 박물관을 만드는 일에는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바 박물관 건립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오히려 아바 박물관은 영국 런던에 세워졌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순전히 외국 관광객을 위한’ 공간으로 스톡홀름에 아바 박물관이 세워졌지만, 스웨덴 사람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해 스톡홀름 중심의 부촌인 외스테르말름(Östermalm)에 있는 오랜 역사의 전통시장 살루할렌(Saluhallen)에 아바의 멤버인 베니 앤더슨이 나타났다. 베니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물건을 사러 시장에 온 것이다. 시장의 상인이나 스웨덴 시민들은 단박에 베니를 알아봤다. 하지만 별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베니를 보고 그저 “헤이(Hej)!” 하고 인사를 나누었고, 베니도 그런 사람들을 보고 웃는 얼굴로 “헤이(Hej)!”라고 응대했을 뿐이다.

그 장면을 지켜본 외국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스웨덴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바의 멤버인데,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인 요청을 하거나 사진 촬영을 부탁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힐끔거리거나 내놓고 쳐다보거나 베니에게 큰 관심을 보일 법도 한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니도 그저 집 앞 시장에 쇼핑을 나온 사람마냥 편안하고 평범했다.

순전히 아바의 나라라는 이유로 2005년 스웨덴으로 이민을 온 일본인 마시다 씨는 몇 해 전 스웨덴 남부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욀란드 섬에 휴가를 갔다가 마찬가지로 가족과 함께 휴가를 온 아바의 아그네사 팰트스코그를 만났다. 마시다 씨는 흥분해서 함께 간 스웨덴 친구 가족에게 아그네사의 출현을 알렸고, 친구 가족과 함께 아그네사 일행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겠다는 마음으로. 그런데 스웨덴 친구가 말렸다. 그들의 휴가를 방해하지 말라면서.

아바의 신곡 발표 소식 직후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아바가 활동을 재개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그네사 팰트스코그와 아니 프리드 링스테드, 그리고 비요른 울바에우스와 베니 앤더슨이 35년 만에 컴백 무대에 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가짜 뉴스였다. 아바는 2곡의 새 노래를 발표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바라는 이름으로 다시 활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세계의 아바 팬들은 실망했고, 좌절하는 사람도 있었다.

35년 만에 술렁였던 스웨덴은 어땠을까? 그들 상당수는 아바가 컴백해서 활동한다는 뉴스를 신뢰하지도 않았지만, 가짜 뉴스임이 밝혀진 뒤에도 덤덤했다. 그들은 늘 즐겨듣던 아바 노래에 새로운 노래 2곡을 더 들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아바가 다시 무대에 선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러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는 없다는 반응이었다.

어쩌면 가장 스웨덴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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