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국영화사 훑어보기-5회:<마부>

▲ 영화 <마부> 포스터

영화소개 : <마부>, 1961년작, 감독 강대진, 출연 신영균, 황정순, 조미령, 김신명 등

“베니스는 1961년, 군사정권 아래 억압적 국가 주도 근대화과정이 시작되기 직전 한국사회의 빈민층의 삶을 다루었던 강대진의 <마부>에 주목했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한국사회,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주도되었던 강압적인 경제 발전은 기형적 근대화를 이끌었고 그 결과는 사회주변부에 방치된 장애인들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이창동 감독의 영상언어로 재현되었다. 베니스는 이처럼 40년의 차이를 두며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재현을 꿈꾸는 영화인들이 그린 ‘사실적’ 한국영상의 초국가적 소통에 대한 기대를 걸게 했다.” - 『한국영화의 초국가성과 정체성의 정치학 : <춘향뎐>과 <오아시스>』 중에서, 이향진

<마부>는 이처럼 한국 리얼리즘 영화로 다가오는 부분이 있다. 그 시대의 처절한 생애와 그 생애 주변을 도는 서울의 도시화 과정. 인간군에도 철저한 계층이 생겨나고, 누군가는 훌륭한 차를 모는 자본가로, 누군가는 남의 말이나 생계의 수단으로서 끌고 다니는 프레카리아트로 자리를 잡는다. 그 불안정한 삶이 말을 끌고 가는 마부의 생애에서 너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아직 도시화된 듯, 또 되지 않은 듯 망설이는 서울의 풍광 역시 그 자체로 불안정하다. 이 영화의 모든 것, 심지어 가족의 구성과 집의 모양, 수원댁과 마부의 사이까지도 불안정할 따름이다. 모든 것은 숨기거나 드러내야만 하고, 그저 자연스레 흘러가는 법이 없다. 무엇이든 불안정한 것이라면 정의되어야 하고, 그게 당시의 시대에 권해지던 풍조였다. 불안정한 것을 삭제하려했지만 사회가 통째로 불안정한 것이 당시의 모순이었다. 이런 모순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마부>는 리얼리즘 영화로 시작했다는 설명이 알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부>가 리얼리즘 영화이기만 하느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맞다. 사회와 도시를 뚜렷하게 비추어내면 낼수록 영화는 장르를 탈바꿈하는 모양새다. 마부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그 점에서 확실한 역할을 한다. 분열되었던 가족이 마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면서 어떤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런데 무조건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과 멜로드라마는 영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행복해 보이려는 모습(이를테면 작은 아들이 정신을 차려 공부를 한다던가, 딸이 제과공장에 취직을 한 것처럼)과 아들의 성공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가족 멜로는 아름답기보다는 끼워 맞춰진 것 같다. 결국 얼핏 보면 가족의 힘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해내는 ‘마부네’ 가족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에 ‘마부네’ 가족인 것처럼, 가족이란 아버지인 마부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공동체에 불과하고, 아들의 고시 합격은 그 낡고 퇴행된 가족에서의 새로운 가부장의 탄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래의 인용을 보면 <마부>에서 드러나는 가부장제라는 낡은 제도와 그 역할이 잘 나타나있다.

“대부분의 가족 멜로드라마의 결말 부분은 이를 잘 드러낸다. <로맨스 빠빠>(60, 신상옥)는 아버지의 생일잔치에 모두 모인 가족들을 보여준다. <마부>(60, 강대진)에서는 아들의 고시 합격 발표장에서 모인 가족들이 함께 눈이 오는 길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삼등과장>(61, 이봉래)의 마지막에서 아버지인 김승호는 ‘가족이란 합승택시를 타고 있는 손님들이야. 부부는 운전수와 차장이지’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가족의 화해와 재결합은 집을 벗어나서 다른 근대의 시간을 살았던 개인을 가족의 경계 안으로 집합시켜서 새로운 미래를 약속한 채 끝이 나는 것이다.” -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중에서. 김선아

 

▲ 영화 <마부> 스틸컷

 

위에서 말하듯, 오히려 근대적인 것은 개인의 시간이다. 가족에서 분리되어 개인의 삶을 살았을 때, 딸이 집밖에서 드레스를 입고 다방을 다니며 워킹을 배울 때 딸이 아버지라는 가부장에 군림당하지 않고 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듯이, 근대적인 것은 개인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굳이 잘 살아가고 있는 개인을 가족의 이름 아래에 집합시킨다. 이것은 가족 멜로드라마처럼 보이는 <마부>가 실은 여러 사회문제에 얽혀있는 근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해 어떤 특정 사회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화임을 알 수 있게끔 한다.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라고 하기에는 가족이 가지는 테마성, 그 주제가 갖는 힘이 너무 강하다. 개인을 가족의 경계 안으로 집합시킨 것도 모자라서 그들은 큰아들의 고시 합격을 통해 가족의 비전을 내려다본다. 가족의 새 미래가 큰아들의 성공에 달린 것이다. 이것은 그 가족에게 있어서도 좋아해야 할 일인지, 슬퍼해야 할 일인지 헷갈릴 따름이다. 큰아들이 성공한 것은 가족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만, 큰아들 아니면 결코 가족은 기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해낸 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영화가 대체 어떤 시각으로 이 가족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가 확고한 가족의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과연 가부장제를 근대와 대칭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그렇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가부장으로 인해, 혹은 새로 생겨나는 가부장(큰아들)으로 인해 다시 공동체라는 늪에 빠지는 가족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근대성에 대해 결코 슬퍼하지 않는 기색이다. 오히려 새로운 비전과 물질적 성공이라는 행복에 겨워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볼 때, 다시 처음의 리얼리즘적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애초에 불안정했던 도시와 사회를 떠올리자. 떠올리면서 아래의 인용을 살펴보자.

“당시의 대표적인 가족 멜로드라마인 <마부> <박서방>(61, 강대진) <삼등과장> <로맨스 빠빠> <월급쟁이>(62, 이봉래)에서 김승호의 도상은 국가공동체의 통합을 위한 시대적 요청과 같았다. 그것은 위약하고 축소된 민족국가의 권력을 가부장제를 통해서 재건하고자 하는 국가의 임시 처방전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영화에서 가부장은 그것이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위상을 점유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기호로 작동한다. 아버지는 국가재건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상징적 질서의 담지자이면서 동시에 국가재건의 핵심인 경제적 근대화에서는 그 근대의 성장과 속도를 견디지 못하는 타자의 위상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근대의 시간, 국가의 시간 : 1960년대 한국영화, 젠더 그리고 국가권력 담론』 중에서. 김선아

근대라는 시간표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근대가 현대가 되고, 현대는 다시 근대가 되는 엎치락뒤치락의 끝에 우리가 사는 오늘이 있는 것이다. 마부의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근대에 살고 있고 그들에게는 현대라는 가장 빠른 시간표이다. 그런 시간표 속에서 가족을 이끌기에 가부장제는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위상에 놓여있다. 이미 역사가 오래되고 낡은 가부장제라는 제도는 더 이상 가족을 근대의 빠른 시간성에 맞춰 움직이게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다시 가부장제를 끌어다 가족의 한가운데에 놓으려고 한다. 어떤 시대적 요청, 그 시대에 강화되었던 민족국가의 권력과 일맥상통하는 가부장적 질서를 정부와 사회는 필요로 했던 것이다. 경제 성장이라는 근대성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낡은 질서와 제도로 그 원동력을 삼으려고 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처절한 모순이다. 이 모순이 <마부>라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가족 멜로드라마에 아주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마지막 인용은 <마부>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모순을 소개한다.

“이 영화들을 보면 60년대 초 서울 공간 속에서 전통과 근대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이 아직 뚜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공간의 빠른 변화가 당시 사람들에게 끼친 효과를 가늠하게 해준다. 특히 <마부>의 서울거리에서는 어떤 경계도 없이 마차와 자동차가 함께 운행되고 떡을 파는 행상인과 극장에 가는 관람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마부>에서 전통은 봉건제적인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며 근대는 극장이나 다방, 패션과 같은 새로운 것들로 채워져 있다. 당시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전통과 근대의 중첩 속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근대화되어가고 있는 서울의 이미지들은 전통을 벗어나 근대로 이행하고자 하는 영화의 서사적 욕망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 『밀실에서 거리로? : 1960년대 한국영화의 공간과 여성』 중에서, 박현선

마차와 자동차, 극장과 다방, 패션, 수많은 미장센들이 전통과 근대의 대립으로 비추어진다. 점점 서울은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것 같지만,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쉽지 않다. 가족은 여전히 오래된 제도를 저버리지 못한 채로 움직이고, 여전히 큰아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온 가족이 그런 어리석은 희망에 목을 매단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치관과 제도의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겉모습만을 서둘러 바꾸는 것에 정신이 없다. 앞뒤가 바뀐 근대화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꼭 큰아들의 극단적 성공이 이루어졌듯이. 하나는 전통을 아예 버리거나, 하나는 아예 버리지 않는 것이다. 아집과 모순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의 격동기는 많은 희생을 강요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모순들이 당시의 국가와 사회가 빚어낸 대단한 성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대는 어떻게 되었는가. 말할 것도 없다. 아직도 괴로운 진통으로 치를 떨고 있지 않은가. 현대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우리는 아직 근대의 창살에 갇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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